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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Nov 26. 2019

캐나다의 청산리 벽계수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15)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15. 캐나다의 청산리 벽계수


한국 기업들이 성장하고 국제적 기업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기업 해외법인에 입사하는 현지인들 수준도 동반 상승하여, 요즘에는 한국인 법인장보다 더 높은 급여를 주는 조건으로 유치하는 우수한 현지 인력도 적지 않고, 때로는 아예 현지 인력이 법인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처럼 우수한 현지인 인력들은 자신의 직장 관리를 위해서라도, 매출, 이익 등 각종 성과에 집중하고 보다 많은 실적을 내기 위해서 누구도 지시한 바가 없음에도 자진해서 야근을 하거나 심지어 휴일에도 출근하는 등 의욕적인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직 한국 기업체가 세계시장에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전인 2000년대 초만 해도 한국업체 해외법인에 입사하는 현지인들 수준은 평균적으로 볼 때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때로는 그저 근무시간만 채우는 식으로 출퇴근하는 직원들도 간혹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꽤 우수한 인력이 채용되어 활약하던 경우도 분명히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가 요즘만큼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월간 단위로 판매 실적을 집계하는 회사 매출 기준상, 통상 월말에는 저녁 늦게까지 많은 제품들을 한꺼번에 출하해야 했던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창고나 출하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월말이 공교롭게도 금요일과 겹치는 경우에는 그런 야근에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 국민들이 그런 것처럼, 캐나다인들에게도 주말 휴일을 즐기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는데, 주말 휴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은 그 연휴 시작점으로 연인과의 데이트, 가족들과의 모임, 친구와의 만남 등으로 이미 계획이 꽉 짜여 있었다.


'Thanks God, It’s Friday'라고 금요일을 만들어 주신 것 체를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표현하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그들이 얼마나 금요일 저녁시간을 즐기고 중시하는지 알 수 있것이다.


따라서 월말이 금요일과 겹치는 날은 출하할 제품은 창고에 가득히 쌓여 있고 거래선의 주문도 받아 놓았는데 물류부서 직원들은 그 중요한 금요일 저녁을 즐기려고 모두가 정시에 퇴근해 버려서 정작 그 제품을 출하할 사람이 상황이 수시로 발생했던 것이었다. 물론 야근 수당을 몇 배로 대폭 올려 준다면야 일부는 남아서 야근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무턱대고 올려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월말 자정 마감 전, 누군가는 제품을 출하해서 그 달 실적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라 결국 출하업무와는 관련 없는 다른 부서 직원들을 동원해서라도 월말 출하는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당월 실적 달성이 절박한 나 같은 주재원들과 그런 주재원들을 버리고 그냥 퇴근하기가 미안했던 한국계 교민 직원들만 남아 월말 출하를 대신 마무리하곤 했다.

 

그렇게 야간에 남아 작업하는 우리들을 우리 스스로 '검은 털'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노란 머리의 백인들과 다르게 한국인 주재원과 국적은 이제 다르지만 한국 출신인 교민 즉 공통적으로 머리털이 검은 동양인만 남아 야간작업하는 것을 자조적(自嘲的)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예를 들자"오늘도 역시 검은 털들만 다 모였네" 뭐 이런 식이었다.




물론 이제는 한국사회도 많이 바뀌어서 비록 급여는 좀 덜 받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서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하는 성향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 대기업에 입사하기가 그렇게나 어렵다면서도 어렵게 입사한 대기업 신입사원 중 20~30%가 3년 이내에 스스로 회사를 그만둔다는 자료까지 있다. 아무리 조건이나 보수가 좋아도 자기 시간과 생활이 보장되지 않거나 자신이 좋아할 수 없는 업무라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 9시나 10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어 있었던 80년대  신입사원 시절에는 한밤중에 퇴근하면서 부서장인 과장에게 "과장님 집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는 씁쓸한 농담도 있었는데,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한 이후 평생을 직장에서 시키는 대로 묵묵히 만 살다시피 했던 인생을 보내고 나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요즘 젊은 직장인들의 인식처럼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좀 더 옳은 삶의 자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절대적인 빈곤으로 먹고사는 것조차 해결하기 어렵던 시절이라면 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이제 한국도 과거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나서 살고 있는 이상, 캐나다인들처럼 인생의 의미, 인생의 즐거움에 좀 더 중심을 두고 인생의 시간을 보내려는 생각이 보다 더 필요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일과 돈 버는 것에만 빠져 주어진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면 100년 아니 200년을 살더라도 그런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인생은 지나고 나면 허망할 뿐이다. 무한할 것처럼 느껴지던 시간과 인생이 어느 날 되돌아보면 결코 무한하지가 않다는 것을 불쑥 깨닫게 되는 순간이 코 앞으로 언젠가는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캐나다 법인의 콜센터에서 근무하던 여자 직원이 있었는데, 마케팅 부서에 와서 한 번 일을 해 보고 싶다 해서 내 부서의 직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바가 이루어져서 인지, 아니면 마케팅부서로 오면서 급여가 조금 더 올라서 인지 한동안은  열심히 의욕적으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지도 않아 점점 표정이 굳어져 가고, 말수도 줄어들더니 결국에는 일이 생각보다는 너무나 많고, 바빠서 도저히 견디기가 힘드니 다시 콜센터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개진해 왔다. 급여가 다시 줄어도 다고 했다. 한 달도 안돼 원부서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그녀가 좀 황당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녀 뜻대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생각해보면 그녀 역시도 시간에 쫓기고 바쁘고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일을 하기보다는, 돈 좀 덜 받더라도 좀 더 편하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겠다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인데, 평생 그러한 분위기나 환경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고 그저 막노동하듯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란 식으로 배우고 살아온 1960년대생 한국인에게는 당시 그녀의 그런 삶의 방식은 꽤 의외였다.



 

법인 재무부서에 근무하던 정말 인형처럼 예쁜 백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법인에서 꽤 유명한 여자였는데, 그 이유는 미인이라서가 아니라 1년에 그녀를 회사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이 채 2~3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도 임신하면 역시 출산휴가가 보장되어 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번 임신하면 약 4~5개월 정도 유급휴가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임신으로 휴가 내고 휴가가 끝나면 출근해서 몇 달 근무 후 다시 임신해서 또 출산휴가를 내는 것을 반복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1년 동안 회사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 기간이 몇 달 밖에 되지가 않았던 것인데, 내 기억으로는 2년 정도 사이에 그렇게 3번 출산휴가를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해서 부부가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아울러 출산휴가를 가는 것 또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고, 당연히 지켜지고 보장되어야 한다. 다만 직원 모두가 그렇게 1년에 2~3 달만 회사에서 근무하는 상황이 온다면 회사는 그러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근본적 대체인력 체계를 다시 세워 운영해야만 하는데 당시는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 또한 회사나 일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우선 더 배려하는 부자 나라 캐나다인의 삶을 살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같은 새마을운동 구호와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으며 자란 나 같은 한국인에게는 그런 그녀 삶과 여유로움이 꽤나 부러웠다.


그녀는 내가 귀국할 때도 출산휴가 중이라 보지 못했는데, 전해 들은 소식에 의하면 내가 귀국한 다음 해에도 다시 임신을 해서 출산휴가를 갔다고 한다.




같은 캐나다라도 서부 밴쿠버(Vancouver) 쪽은 겨울에도 눈이 거의 없는 반면, 동부 토론토에는 겨울에 눈이 자주 또 많이 내린다.


그런데 토론토에서는 눈이 많이 내리면 근무시간 중이라도 퇴근하라는 사내 방송이 나오곤 했고, 그러면 현지인들은 하던 일 모두 중단하고 기분 좋게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는 바로 퇴근했다.


눈이 많이 오면 일찍 퇴근시키는 이유는 직원들 거의 모두 공공 교통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차량으로 출퇴근하는데, 눈이 오면 길이 더 막히거나 차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어 좀 더 일찍 퇴근해야 밤늦게 집에 도착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눈이 그다지 심하게 내리지 않는 날도 그렇게 일찍 퇴근시키는 경우가 실제로는 많았기 때문에, 눈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집에 도착해 보다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캐나다인에만 해당되는 얘기일 뿐이며 당시 주재원들은 본사 눈치 보느라 폭설에도 전혀 관계없이 남아서 근무해야 했었다.


사진) 한 겨울 미시소거 주택가 도로 옆의 눈 (2002년경)


그런데 나중에 대만이나 홍콩에 근무할 때도 비슷한 제도를 경험했다. 태풍 등급을 정해 놓고 일정 등급 이상의 태풍이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나오면 아예 출근을 안 했고, 만일 출근한 이후 그런 예보가 나오면 바로 퇴근했다.


그런데 대만, 홍콩에서도 역시 실제 매우 강한 태풍이 와서 집 밖에 나가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경우에출근을 하지 않는 예보가 발령되기도 해서, 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은 그러한 예보가 발령되는 날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거나 연인과 데이트하러 다녀 시내 영화관이나 식당들은 오히려 손님이 더욱 늘어나는 대목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캐나다, 대만, 홍콩의 제도 모두 일부 불합리성과 부작용이 있더라도, 안전과 좀 더 여유로운 삶을 배려한다는 그러한 개념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법인 리셉션에는 약 60세 정도의 백인 여성 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답할 수 없는 문의 전화를 받게 되면 무조건 외국인인 내게 그 전화를 돌려줬다. 나는 마케팅 쪽 업무만 담당하고 서비스나 품질, 물류, 영업 등은 다른 부서에서 담당하는데도 무조건 내게로 전화를 돌렸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내가 받아서 그 문의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나 부서를 찾아 다시 전화를 돌려주곤 해야 했다.

 

내가 주재원으로 회사 업무도 많이 알고, 책임도 더욱 크니, 자신이 모르는 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리셉션에 근무하는 직원이 아닌데, 자신이 몰라 답하기 곤란한 것은 무조건 내게로 전화를 돌려 버리니, 짜증도 고 정작 내가 본연의 업무가 방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하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찾아가서 왜 그렇게 내게 계속 전화를 돌리느냐고 물었더니, 그녀 말은 자신은 누가 무슨 답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전화를 돌린다고 아주 친절하게 답을 했다. "아니, 그런 그 답할 수 있는 사람 찾아 주는 일이 내 일이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쓸데없이 겉도는 얘기만 반복하게 될 것 같아서 포기했다.

 

하루도 예외 없이 정시에 칼퇴근하는 그녀는 그렇게 애매한 전화는 타인에게 돌려 버림으로써 자신의 시간은 보장되고, 좀 더 여유 있고, 좀 더 부담 없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을 넘겨받은 직장 동료는 그로 인해서 퇴근 시간도 그만큼 늦어지고 여유와 즐거움 또한 줄어들고 있었으니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얻었던 그 캐나다 여성의 여유와 즐거움은 그렇게 정당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요즘은 한국 기업체의 해외법인 운영 수준이 과거와 달리 많이 좋아지고 직원들 업무 구분 역시 명확해지면서, 이처럼 황당한 일이 발생하는 경우는 없어졌다고 들었다.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황진이(黃眞伊)의 시조가 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란 문구로 시작되는 시조인데, 푸른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그러하니 현재 이 순간 즐기자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 시조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찌 보면 결국 요즘에 유행하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자는 'Carpe diem'이나 'YOLO(You Only Live Once)'같은 말들과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같다.


이미 오백 년 전,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에 우리가 요즘에 고민하는 것과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던 셈인데, 그렇게 오래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도 지금 우리와 너무나도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하고 섬찟하기도 하다.


아마도, 그만큼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게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기간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필경 이 시조를 지은 황진이나, YOLO, Carpe diem 같은 말을 만든 사람도 결국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를 뒤돌아보며 그 아쉬움을 마음에 담아 런 말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만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인지는 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다. 무턱대고 일과 돈에만 매달려서 사는 것이 답이 아닌 것처럼, 오직 쾌락에 빠져서만 사는 것 또한 답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빠삐용(Papillon)이라는 영화 주인공이 꿈속에서 재판받는 장면처럼, 신이 부여해준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한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한 번쯤은 혹시 현재 내 삶의 방식이 틀린 것은 아닌지 최소 자문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그래야만 언젠가 이 생을 떠나야 하는 순간에도 조금이라도 덜 아쉽고 덜 후회하고 더 많이 미소 지으며 떠날 수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빠삐용이 꿈속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장면, 01:44)

https://youtu.be/hGpMLIayQEo

 

창으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교실에서 교복을 입고 앉아서 황진이의 시조를 배우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시조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제 그런 시간은 바다에 이미 도착해 버린 시냇물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올해 89세가 되 어머님께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어머님께서는 본인은 일제 강점기 소학교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일장춘몽(一場春夢)과도 같은 우리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렇게 훌쩍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어머님에게도, 나에게도....


1931년 출생하신 어머님 사진. 각각 유년기, 20대, 80대 최근 사진. 동일 인물이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 때

  쉬어 간들 어떠하리"

 

YOLO, Carpe diem과 같은 의미를 가진 500년 전의 조선시대 시인 겸 기생 황진이의 시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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