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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Oct 16. 2023

장례식장에 가면,  

중년에게 장례식장은,

장례식장에 가면, 나의 죽음을 만난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당연한 귀결인데도, 일상에서는 그 당연한 죽음을 잊고 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일상에 죽음이 너무도 번번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죽음이 멀지 않음을, 노후를 준비하듯 죽음도 준비해야 함을 깨닫는다. 


지난주,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 병환으로 오래 고생하셨는데, 쾌차하지 못하시고, 아프신 채로 잠드셔서 몹시 마음이 아팠다. 생전에 그렇게 낚시를 좋아하셨는데, 건강해지시면 꼭 한 번 낚시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삼촌에겐 딸이 하나 있는데, 아픈 아빠를 위해 미리 장례를 준비해 뒀다는 얘길 들었다. 나보다 어린데도 야무진 준비성에 놀랐다. 장례식장엔 아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큰 이모, 작은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이모들 아들, 딸. 모르는 얼굴은 이모의 손자, 손녀들이었다. 어릴 때 봤지만, 어렸을 때 봤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남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른들의 얼굴은 나이가 들어도 크게 변하지 않지만, 아주 어린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되면, 그 모습은 놀랍게 변해있어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늘 그런 말씀을 하시나 보다. 


"자주 봐야 얼굴 안 잊어버리지."


나는, 아주 어린 그들의 얼굴을 너무 보지 않아서 잊었다.


큰외삼촌 내외와 이모들 내외와는 해외여행을 한 달간 같이 한 특별한 경험한 있어서인지 다들 친근한 기억의 살점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특별한 시간을 같이한 특별한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 


20여 년 전에 호주에 살고 있던 작은 외삼촌의 초대로 당시 한국에 살고 있던 작은 외삼촌의 남매는 요즘말로 '호주 한 달 살기'를 하러 갔다. 나의 엄마는 막내 여동생이었는데, 삼촌이 나까지 초대를 해주었다. 호주 작은 외삼촌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와 동갑이라 한 달간 호주에서 그 아들과 짝짜꿍이 맞아서 재밌게 지냈다. 


여하튼, 첫 호주 여행을 가게 된 한국의 대식구들을 위해 삼촌은 한 달의 여름휴가를 몽땅 우리에게 내주었다. 그때, 낚시광 큰외삼촌은 호주에서도 낚시를 하셨다. 아침이면 도시락과 함께 작은 외삼촌이나, 삼촌의 아들이 낚시 포인트에 삼촌을 모셔다 드리고, 저녁이면 삼촌을 모셔오곤 했다. 서호주 바다엔 고기가 그득했다. 나도 그때 삼촌 아들이랑 뜰채를 가지고 무릎쯤 차는 얕은 바닷가에 들어가 꽃게를 잡기도 했는데, 꽃게가 정말 많았다. 그 꽃게로 음식 솜씨 좋은 이모들이 꽃게장도 담고, 간장 게장도 담가서 먹었다. 피크닉 갈 땐, 냄새나지 않게 꽃게를 삶아서 도시락으로 싸가기도 했다. 한인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김치도 사고,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인어 아가씨' 비디오를 빌려다 다 같이 보기도 했다. 하루는 여행 가고, 하루는 집에서 다들 쉬고, 바다에 가서 놀기도 하고... 그렇게 호주 한 달 살기를 함께 한 외가 패밀리들은 그때 이후, 만나면 뭔가 돈독한 분위기가 생겼다. 


그때 이후, 그렇게 오랜 시간 만날 일은 당최 없었지만, 장례식만은 예외로 만나면 오래 함께 한다. 밥도 여러 번 같이 먹고, 얘기도 줄기차게 나눈다. 


올 겨울, 큰 이모의 아들 장례 때 본 사람도 있고, 그때 못 본 사람과는 10년 만이다. 다행이다. 그동안 우리들의 바운더리 안에서는 죽음이 없었다는 얘기니까. 10년 전, 장례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10년이나 되었는데도,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기억에, 현재의 기억을 이어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10년 전 초등학생이었던 사촌언니의 큰아들은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어디, 그들만 변했을까. 그들이 보는 나 또한, 내 삶 또한 많이 변해있을 것이다. 


장례식장에 간다고 지인에게 얘길 했더니, 장례식장에나 가야 친척들을 만난다는 카톡을 보낸다. 다른 자리에서 우리가 일단 만날 일이 별로 없다. 설사 만났더라도, 오래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장례식장은 그런 면에서 특수한 자리다.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오래 머물며 이야기를 나눈다.  



큰 외숙모를 안아주는 것도 장례식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호주 한 달 살기에서, 내내 화려한 원피스룩을 선보였던 우리 외숙모, 그 외숙모가 검은색 한복을 입고, 얼굴마저 새카매진 채로 나를 반갑게 맞는다. 


"우리 외숙모, 고생 많으셨어요." 

"멀리서, 안 와도 되는데 힘들게 와서 어떡해? 고맙다. 고마워."

"숙모, 당연히 와야죠. 당연히 와야 해요." 


밥이 먹히지 않았지만, 다들 어서 밥 먹으라고 정겹게 말하는 터에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싫어하지만 육개장 국물에 밥을 넘긴다. 


큰 이모가 옆으로 와서 

"이거 김치, 숙모가 가져온 거다. 묵은지야. 묵은지에 고기 싸서, 새우젓 조금 찍어서 먹어봐. 맛있더라." 

또, 작은 이모가 앞에 앉아서 "이거, 코다리 맛있더라. 잘라 줄게 먹어봐." 

우리 엄마도 합세해서, "홍어회 맛있더라. 이것도 먹어봐." 


결국, 나는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떡도 맛있다기에 떡도 먹고, 오징어에 땅콩 안주까지 주워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또 아는 얼굴들이 몰려와 인사를 하고 둘러앉는다.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그들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내가 모르는 과거의 내 이야기로 나를 놀리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나는, 가방에 싸 온 커피를 내놓는다. 장례식장에 오려고 준비하던 중에, 주문한 커피가 도착했는데, 그 커피를 보니 장례식장에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러 싸 온 커피였다. 지인에게 장례식장 가는 길에 커피를 가져간다고 했더니 지인이 그런다. "장례식장, 커피 중요."라고 답을 한다. 드립커피를 한 잔씩 내려주니, 모두 좋아한다. 


이모들은, "이제 우리가 언제 가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다. 죽기 전에 자주 보자."라고 말씀하신다. 장례가 끝나고, 이모들은 엄마와 더불어 여행을 갔다. 엄마가 말씀하신다. "이제 우리 셋 남았다." 작은 외삼촌에 이어서, 큰외삼촌의 죽음으로 엄마는 한층 가까워진 죽음을 목도했다. 나도,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40의 중반에 이르고 보니,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가는 일이 더 많다. 중년에게 장례식장이란, 나의 죽음을 더 가까이 만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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