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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12. 2024

해망동 수산시장, 계산하지 않는 시간

상인: 어디 가냐?

나: 안녕하세요.

상인: 뭐 필요하냐?

나: 오징어 사러 왔는데... 요.

상인: 이리 와. 이리 와. 자, 세 마리 이만 원. 갖고 가.     


군산 해망동 수산시장에는 손님에게 반말을 하는 상인이 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익숙하게 반말을 해서 당황했지만, 그분의 외모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운 때문에 나는 감히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상인은 큰 키에다 촘촘하게 파마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진한 화장에다 방수 앞치마, 검정 장화, 빨간 고무장갑을 착용했는데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그 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다음에 갔을 때다.     


나: 생고등어랑 자반고등어 주세요.

상인: 37,000원이다. 

나는 공손한 태도로 4만 원을 드렸다.

상인: 잔돈 없냐?

나는 얼른 천 원짜리를 찾아서 내밀었다.  상인은 “착하다”하면서 병치를 덤으로 주려고 하길래 내가 “그럼 삼천 원 안 받을게요”하며 다시 4만 원을 드렸더니 상인은 세 마리에 만원인 병치를 네 마리나 줬다.    

  

희남 삼촌도 이 가게의 단골이다. 한 번은 삼촌이 거스름돈 오천 원을 받지 않고 킵해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서 “내 거 오천 원 있는 거 알지?”라고 하니까 상인이 “받을 사람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아냐!”하더니 도미, 새우, 조개, 꽃게를 봉지에 담아주며 탕 끓여 먹으라고 했단다. 사장님은 딱 보면 무섭게 보이고, 말도 툭툭 하지만 정이 많은 분 같았다.      


이후 나는 해망동에 가면 다른 곳은 아예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그 사장님에게로 간다. 사장님이 주는 대로 받고 달라는 대로 준다. 가끔은 비싸다 싶을 때도 있지만 물건이 좋겠지 하고 그냥 산다. 어디가 싼 지 일일이 비교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오다 보니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세제 하나를 사는데도 중량과 가격, 배송비, 포인트 적립 금액을 따져서 제일 이득인 것을 선택한다. 사고 난 후에도 더 싼 톡딜이 뜨면 속상해한다. 그래봐야 몇 백 원, 몇 천 원인데 그 이상의 피곤함을 배송받은 기분이다. 그래서 사장님이 하는 반말이 고객님이라는 말보다 정겹게 느껴졌을까? 꼼꼼히 계산하지 않았는데도 넉넉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무튼 덤으로 얻은 병치로 조림을 해 먹고 났더니 이게 무조건 이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연언니가 점심을 먹으러 오기로 해서 오징어를 살까 하고 해망동에 갔다. 사장님은 멀리서 내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기습 질문을 했다.     


상인: 너 뭐 하냐?

나: 네?

상인: 무슨 일 하냐고.

나: 집에서 학생들 수학 과외해요.

상인: 기가 좋아 보여서 물어보는 거다. 몇 살이냐?

나: 45살이에요. 

상인: 나이 마이 묵었네. 고등어 이거 갖다가 구워 먹어라.      


그동안 사장님에게 길들여진 나는 왜 이런 걸 묻지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덤으로 얻은 고등어 때문에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오징어초무침에다 냉이밥, 달래장, 냉이 된장국을 준비했다. 연언니가 식탁을 보더니 봄이 식탁에 왔다며 좋아했다. 냉이밥에 달래장을 넣고 슥슥 비벼서 한 술 입에 넣고, 냉이 된장국을 떠 넣으니 입 안이 냉이밭이 되었다. 그때 오징어미나리초무침을 집어 먹었더니 미나리향과 매콤 새콤함이 맛이라는 산의 정상에 깃발을 꽂는 것 같았다.     


며칠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맑은 날이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따뜻한 밥을 나누고 있으니 이 시간이 참 평화롭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따로 덜어놓았던 달래장과 오징어무침을 연언니한테 싸주었다.   

   

“콩나물밥을 해서 달래장에 비벼먹어요.”

“잘됐다. 애들 콩나물밥 좋아하는데 해줘야겠다. 근데 나는 왜 콩나물밥을 할 생각을 못했지? 콩나물밥 같은 건 쉬운데 말이야.”     


언니는 콩나물밥을 해야겠다며 반가워하더니, 매일 같은 반찬만 해줘서 애들한테 미안하다면서 돌연 자기반성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는데 관심이 많아서(식탐이 많았음) 장보고 요리하는 일이 번거롭지 않지만, 먹는데 나만큼 진심이지 않은 사람은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물건을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집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물건을 정리하는 일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내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보는 것만큼 들이는 노력에 비해 만족을 주는 일도 드물다.      


그렇다고 아무리 식탐이 많은 나지만 혼자 먹겠다고 수산시장까지 장을 보러 가기는 쉽지 않다. 냉이밥, 콩나물밥, 굴밥 같은 건 일 인분만 하기도 어려워서 혼자 먹자고 하기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가끔 별식이 생각날 때 지인을 초대하면 내가 먹고 싶은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상을 차릴 때도 혼자일 때보다는 신경을 쓰기 때문에 손님은 물론 나를 대접하는 밥상이 된다.     


무엇보다 밥값을 생각하지 않고 먹을 때 드는 그 넉넉한 기분이 좋다. 뭐 하나 하려고 해도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계산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이 제대로 속을 채워주는 기분이다.   


(올봄에 썼던 글입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보니 신기할 정도로 똑같은 그릇에다 특별할 게 없는 밥상이네요.) 

       

(또) 똑같은 밥상, 덤으로 얻은 고등어는 무조건 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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