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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26. 2024

삶의 한가운데로

호박을 납작납작하게 썰어서 새우젓에 재워두었다가 들기름을 두르고 볶았다. 호박 반 개가 프라이팬을 가득 채웠다. 호박을 볶다가 연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점심 먹었어요?”

“수업이 연달아 있어서 김밥 한 줄 먹었어.”

“오늘 바쁜 날이구나. 알았어요.”     


멸치육수에다 된장을 풀고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호박 반 개가 뚝배기를 가득 채웠다. 옆집에 사는 은덕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심 먹었어요?”

“지금 먹고 있어요. 약속이 있어서 나왔어요.”

“우리 집에서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그럼 다음에 먹어요.”     


로컬푸드직매장에서 한 개에 1,500원에 사 온 호박은 복스러운 모양만큼이나 양도 많아서 된장국과 볶음을 했는데 혼자는 다 못 먹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얼른 떠오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된장국 속에 익어가는 호박의 샛노란색을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려온 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 이때가 지나면 자체발광하는 노란빛도 사라질 테니까. 

   

호박의 오돌토돌한 면을 씻어서 곡면을 왼손으로 잡고 칼로 속을 가르면 튼실한 속이 드러난다. 여름의 열기가 호박의 속을 채웠을 거라고 생각하니 힘겨웠던 더위가 고마워진다. 가을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호박으로 푸짐하게 상을 차리고 나니 먹기 전부터 배가 부르다.


호박을 손으로 만지고 썰고 노란 속을 보고 감탄하는 일련의 일들이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것 같다. 사는 게 권태로웠던 시기에는 만지고 감탄했던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별한 이벤트를 찾아다니느라 그 자체로 다채롭고 풍요로운 삶, 그 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요리에서 파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찌개나 국은 마지막에 파를 넣어야 국물이 개운하고, 계란말이에 파만 넣어도 맛이 살아난다. 냉장고에 파를 그득히 넣어두고, 칼자루에서 칼을 뽑듯 쓱 꺼내서 썰어주면 요리하는 맛이 난다.  

     

시중에 대파 가격이 한창 오를 때도 로컬푸드직매장은 저렴해서 나는 갈 때마다 두 봉지를 사 오고는 한다. 대파에는 생산자 이름이 적혀있는데, 그걸 보면 농산물을 수확해서 일일이 포장하는 사람이 상상이 된다. 실제로 매장에서 농산물을 진열하는 분을 종종 마주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로컬푸드직매장에서는 많이 살 수가 없다. 한꺼번에 사다 놓았다가 채소가 시들어 버리면 돈만 아까운 게 아니라 농사를 지은 분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사는데도 신중해진다. 이걸로 뭘 만들지? 고구마순으로 무침을 할까, 생선조림을 할까, 배추 속은 쌈 싸 먹고, 겉잎은 배춧국을 끓여야겠다, 등의 계획으로 머릿속이 분주하다. 


내 손에 들어온 작은 것에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평화롭게 하는지. 물건을 사면서 욕심이 사라지는 기분, 갖고 싶은 마음보다 물건이 제 효용을 다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좋다.


가끔 먹방을 볼 때 노포를 찾아가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는 출연자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켜온 주인은 그 모습을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을까. 홍보가 되니까 사장님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이 돈으로 덮여버리기 때문에 삶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물건을 생산하고 운반하고 진열한 사람을 상상하고, 한 사람이 보낸 시간을 가늠해 보고, 물건이 제 쓸모를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 삶의 한가운데로 가게 하지 않을까. 직접 만지고 보고 감탄하는 다채로운 삶의 한가운데로.

된장국에서 익어가는 호박색이 예뻐서


로컬푸드직매장에 가면 대파 두 봉지를 사 온다
호박된장국과 호박볶음으로 풍성해진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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