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를 보내려고 우체국에 갔더니 점심시간이었다. 굳게 닫힌 문에는 1시 30분에 영업을 재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때 시간은 1시 10분. 20분이나 어떻게 기다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갔다가 다시 오는 것보다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고작 20분인데.
생각해 보니 어이없었다. 뭐가 그리 바빠서 20분을 기다리면 큰일 날 것 같았을까. 서두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멈추어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문득 자고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술 마시는 게 전부고, 다음날 오전은 내내 숙취에 시달리는 게 일상이었던 이십 대 시절이 떠올랐다. 새벽까지 함께 있었던 벌떼(꿀대신 술을 먹는 5인조) 오후에 다시 합체해서 숙취 증상으로 배틀을 했다. 술로 인한 각종 몸의 장애와 고통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안주 이야기로 넘어갔고, 정신 차리고 보면 다시 술잔이 앞에 있고는 했다. 숙취 배틀은 술을 마시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택배를 벌떼 멤버 중 하나인 주한테 보내는 거라 이 생각이 났나 보다. 주가 얼마 전에 SNS에 업로드 한 글을 읽고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는 애들 클 때는 마른반찬이 최고라면서 멸치며 북어채, 오징어채, 쥐포, 말린 새우, 건미역, 다시마 따위의 건어물을 한가득 사 와서 우리 집 냉장고에 쟁여 놓았다. 나는 요새 누가 마른반찬을 먹냐고, 도시락 싸는 시대가 아니라며 짜증을 냈다. 사실 마른반찬이 싫어서가 아니라 용돈도 넉넉히 못 드리는데 엄마가 나한테 돈 쓰는 게 미안해서 그런 건데 엄마는 알았을까? 투덜대지 말고 내 마음을 다정히 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라는 존재는 삶 곳곳에 스며있어서 내내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냉장고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멸치처럼. 당연하게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내 삶 가장 아래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던 것이 사라졌을 때 허공에 발을 딛는 것처럼 휘청거리게 되지 않을까. 주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추석에 엄마가 준 된장으로 찌개를 끓이다가 주가 생각났다. 도무지 양조절을 못하는 엄마는 나는 일 인분만 있으면 되는데 늘 삼인분을 챙겨준다. 지난해 설과 추석에 준 것도 남아있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참기름, 깨, 미역, 다시마, 간장, 간 마늘, 알마늘, 까만 콩, 완두콩, 똥을 깐 국물용 멸치, 볶음용 멸치 등등을 싸줬다. 새언니도 나와 처지가 같아서 안 가지고 가겠다고 하길래 내가 새언니에게 귓속말로 “친정어머니 드려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엄마도 “그래, 그래라”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준 삼인분을 주와 나누는 거다. 내가 그랬다고 하면 우리 엄마는 “아이고, 참 잘했다. 너무 잘했다”라고 할 게 분명하다. (며칠 후에 엄마한테 말했더니 복지었다며 칭찬했다)
벌떼의 또 다른 멤버 동동맘에게는 오빠가 세 명이 있는데, 그중 첫째 오빠는 우리가 대학생일 때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가장이었다. 첫째 오빠가 동동맘에게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렇게 놀아보겠냐. 앞으로 그런 시간은 오지 않을 거야.”
동생이 한심해서 한마디 하려다가 그래 저때가 아니면 언제 시간을 물 쓰듯이 해보겠냐, 저도 생각이 있겠지, 앞으로 뭐 하고 살지 본인이 더 답답하겠지, 훈계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체념과 이해의 필터를 거치고 나온 정수 같은 말이 아니었을까.
한편으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약간의 부러움도 있지 않았을까. 결국 빡빡하게 살게 될 줄 알았더라면 놀 수 있을 때 놀아볼 걸, 너라도 실컷 놀아봐라, 하는 대리만족 같은 거 말이다.
살아보니 실컷 놀 시간은 이십 대밖에 없다는 동동맘의 오빠님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이십 분을 기다리는 일이 큰 일처럼 느껴지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바쁜 중에도 아이스박스 상자를 큰 걸로 구하고, 간장을 담은 병이 깨지거나 새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플라스틱 병에 옮겨 담아서 뚜껑을 꽉 닫고, 이동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도록 빈틈없이 상자를 채우고 다시마로 덮은 건, 친구가 커다란 빈자리를 잘 견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십대라는 시기는 어디서 어떻게 보냈든 아련하게 그리운 그 무엇이다. 찬란하고 눈부셔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것.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남아있어서 가슴이 꽉 차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