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밖에서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거실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다. 급하게 거실 창문과 안방 베란다문을 닫았다. 그새 비가 들이쳐서 창 앞에 물이 흥건했다. 수건으로 밖을 닦으며 아무래도 약속을 취소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주에서 군산까지 운전해서 오는 나영샘 때문이었다. 더구나 6개월 된 아이와 함께 온다니 더 걱정이 되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30분. 약속 시간은 12시였다. 취소하려면 출발하기 전에 해야 하니 함께 보기로 한 연언니한테 카톡을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위험하니까 나영샘한테 오지 말라고 해야 할 것 같애.”
연언니는 수업 중인지 답장이 없었다. 비는 계속해서 무섭게 내렸다. 그 순간 약속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 이건 무슨 마음일까. 만나면 분명 좋을 걸 알지만,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이토록 기쁘다니, 참 이중적인 마음이다.
삼십 분이 지나자 비가 그쳤다. 연언니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확실히 정한 건 아니지만, 점심을 먹고 우리 집에서 차를 마실 수도 있어서 청소부터 했다. 나영샘 주니어가 쾌적하게 놀 수 있도록 거실과 방을 닦고, 화장실 두 개를 청소하니 땀이 비 오듯이 났다. 아침에 갈아입은 파자마가 흥건히 젖었다. 샤워를 하고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는 거실에 제습기를 틀어놓고 약속장소로 갔다.
한식뷔페에서 밥을 먹었는데 다양한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생선구이, 깻잎튀김 같은 불에 굽고 튀기는 음식을 땀 하나 안 흘리고 먹으니 좋았다. 백김치, 겉절이 등 김치도 종류별로 있었다. 그중 제일 맛있었던 건 묵은지멸치조림이었다. 한식 말고도 스파게티, 떡볶이도 있어서 수북이 담아서 세 번을 가져다 먹었다. 접시를 반납하는데, 주방 내부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이 땀을 흘리며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님이 많아서 설거지할 접시가 키 높이까지 쌓여있었다. 음식이 금세 떨어져서 보충을 하느라 한 분은 계속 요리를 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손님이 많으면 사장님은 돈을 벌고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서 좋은 게 맞는데, 왜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금방 편하게 다양한 반찬을 먹어서 좋다고 해놓고 말이다.
식당을 나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갔다. 나영샘은 빈손으로 못 간다며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커피와 케이크를 사가지고 왔다. 거실에 얇은 이불을 깔아놓고 그 위에 나영샘 아들 주원이를 놓고 나영샘, 나, 연언니가 포위했다. 우리는 길게 누워서 예전에 아이 키우던 이야기를 했다.
“하루가 진짜 안 가요. 이렇게 밖에 잠깐이라도 안 나가면 하루가 너무 길어요.”
나영샘은 오늘은 여기에 와서 하루가 잘 갔다며 기뻐했다. 나영샘은 작년에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 아이가 육 개월이 된 요즘에야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육아책 추천해 주고 싶은 거 있어요?”
나영샘의 질문에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었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읽어봐. 박혜란 작가는 가수 이적 어머니이기도 해.”
오래전에 읽었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박혜란 작가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는 엄마는 박혜란 작가밖에 없었다고 했다. 책에서 그걸 읽고, 나중에 가수 이적이 방송에서 그 얘기를 한 걸 보았다.
“우리 엄마는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를 맞을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엄마와 집으로 돌아간 운동장에서 형과 비를 맞으면서 놀았던 기억이 나요. 제 노래 중에 <빨래>라는 곡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으로 쓴 곡이에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결핍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부모가 생각하는 만큼 자식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결핍에 집중하는 부모 때문에 아이가 빈곤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자아상이 형성되는 것 같다. 부모가 부족하고 못 미덥게 보면 아이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자식은 부모가 바라보는 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자라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바꾸면서 그림을 완성해 가겠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각인된 것을 바꾸는 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보는 대로 자라는 아이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을 따라서 한번 만들어 본 말이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난 뒤에 이불을 접어서 벽장에 넣었다.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뭐랄까 마음이 바싹 마른빨래처럼 고슬고슬해진다. 마음의 먼지를 털어낸 것처럼 가벼워진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