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년 전, 눈이 많이 내린 크리스마스 연휴였다. 나는 무주 구천동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이틀을 예약했다. 첫날은 오후 늦게 도착해서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 책을 좀 읽다가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조식으로 토스트와 시리얼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생각이 없었다. 숙소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덕유산까지 왔는데 한번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다 보면 시간만 흘러가 버릴 것 같아서 롱패딩과 운동화 차림 그대로 길을 나섰다. 코스는 구천동 탐방지원센터부터 향적봉까지로 잡았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연신 땀이 흘렀다. 나는 롱패딩을 벗어서 들고 가다가, 어깨에 맺다가, 허리에 묶었다가, 뒤에서 보면 누구와 싸우는 걸로 보일 정도로 롱패딩과 사투를 벌였다. 그 와중에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 나눠 먹는 건 어찌나 잘 보이던지 치킨, 김밥, 각종 반찬을 펼쳐놓고 먹는데 아침도 패스하고 달랑 생수 한 병 들고 가는 나로서는 참기 어려운 허기가 밀려왔다. 산 아래에서는 없던 식욕이 산에 와보니 뭐 하나라도 구걸해서 먹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게스트 하우스를 검색하다가 알게 된, 향적봉 대피소에서 라면을 판매한다는 사실이었다.
‘향적봉 대피소까지 가자, 거기서 라면을 먹는 거야’
이 한 가지 목표로 바득바득 올라갔다.
가다 쉬기를 수없이 거듭한 끝에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야 향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아침 열 시쯤 출발했는데 어떻게 올라간 건지 미스터리다. 지금의 나라면 8.9킬로미터는 세 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매점부터 찾았다. 향적봉 대피소에는 육개장 사발면 말고도 초코파이와 커피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 셋을 세트 구매하고, 만 원을 내고 삼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뜨거운 물을 부은 사발면을 받아 드는데 따뜻한 온기가 새삼스러웠다. 연휴를 맞아 눈꽃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테이블은 아예 자리가 없었고, 바닥에 놓고 먹을 만한 곳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는 길 한쪽 구석에 나는 겨우 자리를 잡고 초코파이, 커피, 사발면을 눈 위에 펼쳐놓았다. 소박하지만 감격스러운 만찬. 초코파이 부스러기 하나라도 떨어질세라 조심해서 베어 먹었다.
사발면 국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나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득하고도 숨 막히는 곳에 와있었다. 전국의 온갖 산을 누빈 지금도 향적봉 조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곳이 존재하고 그곳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곳. 운무 사이로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바다에 떠 있는 섬 같았고, 그곳을 보고 있자니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다인지 산인지 헷갈렸다. 여기가 걸어서 올 수 있는 곳이라는 게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데서 아침을 맞이하면 어떤 기분일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향적봉 대피소 외벽을 살펴봤다. 그때 안내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약한 사람만 숙박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잠도 잘 수 있나 보네? 나는 자연휴양림에서 자봤지만, 대피소에서 숙박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대피소라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대피소’를 쳐봤더니 지리산 종주가 떴다. 지리산 종주를 하고 난 사람들이 자신의 후기를 블로그에 올린 것이었다. 그걸 하나씩 읽다 보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글에는 어떤 비장함과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나는 후기를 읽고 또 읽었다. 나도 지리산 종주를 하고 나면 이런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대뜸 이런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해보자! 지리산 종주.
당시에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마음속에 지리산처럼 높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 두 발로 넘어가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내 두 다리로 한 발 한 발 딛고 넘어서고 싶었다.
한 달 후에 있는 구정 연휴를 디데이로 잡고 준비를 시작했다. 한겨울에 2박 3일을 산에서 먹고 자야 하니 필요한 장비가 한둘이 아니었다. 온라인으로는 도무지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매장에서 직접 보고 사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사는 지역보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대구에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수월할 것 같아서 신정에 대구를 내려갈 때 사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간 대구의 한 아웃렛 단지 내 등산 브랜드 매장은 1층은 등산복, 2층은 등산용품이 있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사장님에게 말했다.
“버너랑 코펠 보여주세요.”
“캠핑하시게요?”
사장님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뇨, 지리산 종주할 건데 대피소에서 사용할 거예요.”
내가 비행기 재료로 쓴다는 티타늄으로 만든 코펠을 보고 있으려니까 사장님이 다가왔다.
“그런 거는 전문 산악인이 히말라야 등정할 때나 쓰는 거고요, 손님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단호하면서도 친절한 말투의 사장님의 손에는 ‘군대 반합’이 들려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남서벽(4300미터)을 오르게 될지 몰랐던 나는 사장님의 말에 수긍하고 군대 반합을 접수했다.
다음은 배낭. 50리터 배낭을 메 보면서 여기에 2박 3일 치의 식량, 옷, 장비가 다 들어갈 수 있을까 가늠해 봤다.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종주를 한 블로거들이 적어도 50리터 배낭은 있어야 한다길래 나도 원색의 배낭 중에 그나마 제일 무난해 보이는 쥐색 50리터 배낭을 골랐다.
이제 가장 중요한 재킷을 고를 차례. 덕유산에서 누구와 싸우는 걸로 보이고 싶지 않다면 패딩은 안된다는 교훈을 얻은 나는 정상가 80만 원인 고어텍스 재킷을 큰맘 먹고 샀다. 50퍼센트 할인을 하고도 40만 원, 나한테는 거금이었다.
고른 것들을 모아보니 대략 배낭 20만 원, 등산화 18만 원, 고어텍스 재킷 40만 원, 스틱, 스패치, 장갑 등등해서 100만 원은 우습게 넘어버렸다. 하지만 생명을 돈과 바꿀 수는 없는 일. 필요하다 싶은 건 다 사기로 했다.
이제 지리산으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내 나이 꼭 마흔이 되는 해, 1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