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덕유산에 있었을 때, 남편의 친구 아내인 M 언니로부터 부친상 문자를 받았다. 이박 삼일 일정 중 삼 일째 아침에 문자를 확인하고, 짐을 꾸려 전주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는 남편이 딸을 데리고 와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우리는 별거에 들어갔기 때문에 거의 5개월 만에 보는 남편이었다. 나와 남편은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고, 당시 열 살이던 딸은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사이 남편의 친구 부부 세 쌍이 도착했다. 모두 M 언니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오랜 시간 각별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한 달에 한 번 가족 모임을 해왔기 때문에 나와도 가까워진 사람들. 이야기가 길어지자 G가 장례식장에서 멀지 않은 자기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고, 다들 그러자며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할까, 내가 차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 남편이 다가왔다.
“괜찮으면 들렀다 가지.”
나는 거절하기도 뭐해서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한번 숙여 보였다.
G의 집에서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G가 예전에 배웠는데 지금은 연주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며 클라리넷을 들고 나왔고, 다들 소리는 나오냐, 모형 아니냐, 너랑 안 어울린다며 농담을 했다. 그러고도 내내 격의 없는 장난이 오갔지만,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남편이 나보다 여덟 살 연상이라 친구들과 아내들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모두의 삶이 그렇듯 그들도 나름의 어려움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밤새 술 마시며 우스갯소리도 많이 했지만 그즈음 나의 고민을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기도 했다. 내가 털어놓았던 고민은 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어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마음속에 곪아가고 있던 남편과의 갈등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아내들은 나보다 이십 년 또는 십 년 먼저 남편을 알아 왔고, 부부 사이의 갈등을 각자의 방식으로 통과했거나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어떤 얘기를 꺼냈더라도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었을 텐데 나는 왜 말하지 못했을까.
G의 집을 나왔을 때는 밤이었다. 나도 술을 조금 마셔서 대리운전을 불렀다. 대리운전기사가 오자 남편은 나와 딸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당시 내가 딸을 키우고 있었고, 남편은 연휴를 맞아 딸을 데려갔었다. 나와 딸이 차에 타자 G가 기사님에게 대리비를 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다. 나를 보고 조심해서 가라고 하는데 불쑥 눈물이 치밀었다.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고마워요”하고 웃었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G가 진작에 우리 부부의 문제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친구의 눈에 내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싶어 설움에 북받쳤다. 내가 딸과 함께 있는데도 잘 가는지 보지 않고 가버린 남편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때 잡고 있던 끈을 놓았던 것 같다. 군산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라 돌아보지 말고 나를 연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고, 그와 이어진 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버렸다.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였지만, 그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이 자신 없었고, 아이가 아빠와 함께 살지 못하고 자라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혼은 남편 하고만 헤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가족, 친척, 친구를 이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들을 잃을 것 같았다. 사람들과 멀어진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 수 있을까. 외롭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앞으로 나를 지키고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겁이 났다.
당시 내게는 이런 내 마음을 터놓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나를 동정하지 않고 봐줄 것 같은 사람이 없었다. 나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리산 종주를 결심한 데에는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서 지리산 종주를 떠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