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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01. 2024

계획대로 된 건 아무것도

시작부터 계획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차에서 조는 바람에 구례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순천역에 내려서 1시간 30분을 기다려 역방향 기차를 타고 구례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기차에서 내린 후 택시를 탔지만, 택시는 성삼재에서 이 킬로미터 아래에 있는 시암재도 못 와서 빙판길에서 헛바퀴를 돌았다. 기사님은 성삼재 휴게소로 가는 도로 위에 나를 덜렁 내려놓고 가버렸다. 나는 집에서 출발하는 것부터 돌아오는 것까지 대중교통 경로와 등산코스를 에이포 용지 세 장에 걸쳐 적어 왔는데, 그때까지 계획과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끝까지 눈으로 뒤덮인 길을 바라보며 배낭 무게 때문에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몇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눈앞에 택시 한 대가 서더니 눈 때문에 올라가지 못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헛바퀴를 돌았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바로 직전에 내가 겪은 상황을 카메라 위치만 바꿔서 재생해서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오르기를 포기하고 멈춰 선 택시에서 한 이십 대 여성이 내 것보다 두 배쯤 큰 배낭을 들고 내렸다. 동병상련을 느끼기에 이보다 더 딱 들어맞는 상황은 없었다. 나는 그 여성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다. 그녀도 나와 똑같이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가는 데다 연하천 대피소와 장터목 대피소를 예약한 것까지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좀 전까지의 서글픔이 사르르 녹더니 반짝 해가 뜨는 것 같았다.      


그 여성의 이름은 지희,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지희는 한 달 전 한라산 등반에 성공하고 이번에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향적봉 대피소에서 라면 국물을 마실 때 지희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 백록담을 마시지는 않았겠지만, 봤다는 얘기였다. 와, 스물일곱 살에 이 정도 스케일이면 마흔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 진심으로 감탄했다. 

    

감탄의 시선을 받은 것도 잠시, 지희는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산길도 아니고 아스팔트 길에서 왜 그러는 거지... 잘은 모르지만, 지희도 나 못지않은 등산 초보 같았다.     


내 형편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었다. 헬스와 동네 등산으로 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거운 배낭 때문에 도무지 맥을 출 수가 없었다. 지희와 나는 몇 번을 가다 쉬기를 거듭하다 겨우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친 기분이었다. 천왕봉까지 어떻게 가나, 까마득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지희는 그날 새벽까지 술을 마셔서 속이 울렁거려서 그랬다고 했다.      


대피소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사과를 꺼내서 먹으려고 하는데, ‘딱 봐도 산악인’으로 보이는 분이 말을 걸었다.     


“지금 열두 시인데 그러고 있으면 늦을 텐데요. 해가 일찍 지니까 서둘러야 할 거예요.”        


그분은 우리의 배낭과 어설픈 폼에서 ‘종주 중’이라는 것과 ‘초보’라는 것 두 가지 정보를 동시에 간파한 것 같았다. 옆에는 보잉 선글라스를 낀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순간 나는 이 두 분을 쫓아가야 완주할 수 있다는 어떤 직감이 발동했다. 나는 점심으로 먹으려고 꺼냈던 걸 도로 배낭에 집어넣고 두 분을 쫓아갈 채비를 했다. 술이 안 깨서 멍하게 있던 지희도 나를 보더니 서둘러 배낭을 둘러맸다.     


나한테 말을 건 분은 유대장, 보잉 선글라스를 낀 분은 하대장이었다. 두 사람도 노고단 대피소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화대종주(화엄사에서 대원사, 46.2킬로미터) 중이었다. 그렇게 유대장, 하대장과 성중종주(성삼재에서 중산리, 33.5km)를 하는 지희와 나, 이렇게 네 명은 한 팀이 되어 천왕봉까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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