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밀당을 한 <그리스인 조르바>
독서회 회원 모집 공고를 본 건 11월 중순이었다. 무인대출신청을 하려고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보게 되었다. 공고가 난 도서관은 신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서관이었는데, 나는 그 도서관이 개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독서회가 있는지 전화로 문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직 운영계획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모집하는 글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안내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자 직원이 내 연락처를 독서회장에게 전해주겠다고 했다. 몇 시간 후 독서회장으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독서모임 안내드립니다. 11월 28일 오전 10시~11시 30분, 장소: 도서관 3층 강의실, 토론할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독서회장이 보낸 문자에 나는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책장에서 조르바를 찾아냈다. 날개를 펴듯 책 등을 가르자 웅크리고 있던 조르바가 먼지를 털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알게 된 건 한비야 작가를 통해서였다. 한비야 작가의 인생책을 소개하는 책이 있었는데, 24권의 책 목록 중에 <그리스인 조르바>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십 대 후반에 회사를 관두고 세계여행을 떠난 한비야 작가에게 나는 매료되었다. 그녀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런 그녀가 조르바를 세상에 둘도 없는 열정적인 인물로 소개했다. 그녀가 떠날 수 있었던 용기가 조르바에게서 온 게 아닐까 하는 기대로 나는 당장 책을 사 왔다.
기대에 차서 책을 펼쳤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에게 조르바는 기인이나 괴짜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르바에게 ‘두목’으로 불리는 소설 속 화자도 조르바에 대해 찬양에 가까운 묘사를 늘어놓았지만,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절반도 읽지 못한 채 책을 덮고 말았다. 하지만 고전 반열에 오른 그 책은 잊을만하면 나의 레이더망 안에 들어와서 다시 책을 펼치게 했다. 몇 번을 읽다가 포기하고, 조금 더 페이지를 넘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완독에 성공했다. 그러는 데 걸린 시간이 자그마치 십 년. 나와 조르바는 길고 긴 밀당을 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임 하루 전날, 모임장에게 또 한 번의 문자가 왔다.
생각 나눔 할 내용을 보내드립니다.
1. 내가 만난 조르바 같은 사람은?
2. 나라면 조르바와 잘 지냈을까?
*
독서회 모임날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조금 늦게 집을 나서게 되었다. 첫날부터 지각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았고 주차장에 자리도 있어서 약속시간인 10시가 되기 전에 도서관 건물에 들어설 수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니 문이 열려 있는 강의실이 있어서 그리로 가보았다. 강의실 안에는 꽤 많은 수의 회원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회원들에게 목례를 한 뒤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모임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맞아주었다. 알고 보니 모임장인 이선생님은 나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한길문고에서 하는 강연에서 몇 번 뵙고 인사를 나눈 분이었다.
“김준정 선생님이셨네요. (회원들을 향해) 김준정 선생님이시고, 배지영 작가님하고 친한 분이세요.”
내가 ‘배지영 작가랑 친한 사람’로 소개되자 이것이 내 인지도의 현주소가 하는 생각이 (그것도 군산 하고도 독서인들 한에서) 들었고 동시에 군산문화대통령(내가 작명한 배지영작가 별명)에 걸맞은 배지영작가의 유명세를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설명을 보태자면 나는 6년 전 열린 배지영작가의 에세이 쓰기 강의 1기 수강생이었다. 배지영작가는 이후에도 글쓰기 강의를 이어가서 수강생이 전국적으로 포진되어 있고, 현재 군산에서만 수강생 모임이 6기까지 있다.
독서회 회원은 총 13명. 이날 나 말고도 두 명의 신규 회원이 있었다. 모임장은 회칙(2분기마다 2만 원 회비가 있고, 출석률 50프로 이하시 탈퇴)을 알려주고, 이제 인원이 많으니 회원 모집 공고는 내려달라고 도서관에다 얘기하겠다고 했다. 이어서 새로 온 회원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한 분은 독서모임을 해야 책을 읽을 것 같아서 나왔다고 했고, 다른 한 분은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많아서 말을 하고 싶어서 신청했다고 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가입했다고 짧게 말했다.
*
“책을 추천한 오선생님께서 발문해 주시겠어요?”
모임장이 한 남성회원을 보고 말했다. 그 남성 회원이 책을 추천하고 발문을 쓴 분인 것 같았다.
“내가 만난 조르바 같은 사람을 생각해 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대신 이런 가정을 한번 해봤어요. 회사 동료가 조르바 같은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고요. 잠깐 생각해 봐도 골치 아플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벌린 일을 다른 사람, 즉 나 같은 사람이 수습을 해야 할 것 같거든요. 소설에서도 갈탄 사업이 망해서 화자한테 금전적 손실을 입히잖아요.”
나도 ‘조르바 같은 사람이 부모라면’ 하는 가정을 해보았다. 생각만으로 머리가 아팠다. 가족이나 회사 동료처럼 나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 중에 조르바 같은 사람이 있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다른 회원들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방종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조르바의 자유가 저한테는 무책임한 방종으로 보였어요. 이런 사람이 많다면 사회가 어떻게 제대로 돌아가겠어요. 저는 조르바 같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60대로 보이는 남성회원이 말했고, 한 여성회원이 말을 이었다.
“친구 중에 한 명은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았어요.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젊을 때는 좋아도 나이가 들면 후회할 거라고 했는데, 그 친구는 50대가 된 지금도 잘 살아요.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고, 고아원 후원도 하면서요.”
이 이야기에 대해 몇 명의 회원들이 의견을 내놓았다.
“요즘 자식을 낳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고아원에 후원을 하는 분이면 이기적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이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모임장이 그때까지 아무 말하지 않고 있던 나에게 물었다.
“김준정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혹시 그 친구분이 자녀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나요?”
친구 이야기를 꺼낸 여성회원이 대답했다.
“네. 잘 들어줘요.”
*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건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 여유가 커지고 커지면 자유가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나와 다른 견해에서 뜻밖에 흥미로운 지점을 걸 발견할 때 탁 트인 곳에 나온 기분이 든다. 그 경험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건 마치 문을 열어놓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기분과 비슷했다.
자유만큼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는 단어도 없을 것 같다. 사회적 규칙이 지금만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시대에서 조르바 같은 사람이 많으면 아이, 노인, 여성이 피해를 입어왔다. 조르바의 본능에 따르는 행동을 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는 데는 이런 두려움이 있다. 자유에 대해 의미 있는 정의를 하려면 우선 안전과 복지가 보장된 사회와 의식주를 해결할 개인의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그리는 자유는 나다운 방식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며 찾아가는 과정이 설사 불안하게 보인 다할지라도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선선히 내보일 수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한비야 작가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떠날 수 있는 용기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떠나야만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떠나지 않고도 지금 여기, 이 모습 이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은 이유다.
책: <그리스인 조르바>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