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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리허설이 없다고 하잖아요

기분 좋은 반전을 일으킨 <몸에 밴 어린 시절>

by 김준정

“애들이 어릴 때 이 책을 읽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그랬다면 예전처럼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을 텐데.”


“저도 첫째는 많이 통제했던 것 같아요. 둘째는 그보다 많이 허용하면서 키웠어요.”


“맞아요. 이제는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늦었네요. 왜 알고 나면 늦은 걸까요.”


“그래서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하며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독서모임에서 이번에 함께 읽은 책은 <몸에 밴 어린 시절>이다. 이 책에는 누구나 성장환경에서 형성된 내면아이가 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저자인 W. 휴 미실다인은 과거 부모가 했던 행동을 자신에게 하기 때문에 이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면아이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근데 읽는데 좀 불편했어요. 모든 문제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잖아요. 저는 살아가면서 경험한 것에서 나를 형성한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부모님의 잘못을 찾게 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나름대로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잖아요.”


나도 회원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성장환경에서 원인을 찾는 이론에는 하나의 기본 전제가 깔려있는 것 같다.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 전제가 문제를 푸는 걸 더욱 어렵게 하는 게 아닐까.


*


나는 서른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학원을 개업했다. 나의 삼십 대는 치열하게 살았지만, 많은 관계에서 사고가 터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즈음 유년시절의 상처에 집중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과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머릿속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내가 겪고 있던 문제가 명쾌하게 설명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불이 환하게 켜진 것 같았던 처음의 기분과 달리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의 내 모습은 아주 오래전에 결정된 당연한 귀결 같았다. 나로서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이 있고, 나는 그 힘이 이끄는 대로 떠밀려가는 존재 같았다. 스스로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부모님을 대하니 부모님과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


최근에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은 어머니가 모처럼 이모들과 제주도 여행을 간 날이었다. 마침 수업이 일찍 마쳐서 혼자 식사를 하고 TV 앞에 있을 아빠가 생각나서 전화를 해봤다.


“우째 지금 시간이 났노?”


아빠는 적적하던 차에 걸려온 전화가 반가운 눈치였다. 평소처럼 대화의 활주로는 딸아이였지만 그날은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버지의 월남 파병 시절까지 날아갔다.


“군사월남어교육대라 카는 기 있었어. 베트공하고 통역을 시킬라고 부대에서 제일 똑똑한 아 하나를 뽑아가 월남어를 배우게 했거든. 우리 부대에 월남어교육대 나온 아가 나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그 동기가 그러더라고. 여기서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공부해가 맞춤법을 다 깨우치고 가라고.”


그 말을 들은 후 아버지는 한글 쓰기 연습을 했다고 했다. 한국 군대에서는 작업이 많았는데, 그에 비해 베트남에서는 시간이 있는 편이었다고 했다. 글씨를 쓸 기회가 별로 없었던 아버지는 그때 처음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한편 아버지는 오빠의 글씨를 못마땅해했다.


“어디 가서 글씨가 그 모양이면 사람 취급 안 해. 글씨는 자기 얼굴이라. 사회생활 할라만 글씨부터 제대로 쓸 줄 알아야 돼.”


아버지가 오빠를 나무랄 때마다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과거에 나는 아버지는 대학에 들어간 오빠를 펜글씨학원을 등록해서 다니게 하는 걸 보고 억지스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종이와 연필을 구해서 내무반 바닥에 엎드린 청년을 그려보자 아버지가 왜 그렇게까지 자식의 글씨에 집착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글자 하나하나에 반드시 고국에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써 내려갔을 것이다.


*


“이 책 어떠셨어요? 번역에 문제인지 몰라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미국에서 1964년에 출판한 책이라 사례로 든 것이 지금 상황에 맞지 않아서 와닿지 않는 것 같아요.”


<몸에 밴 어린 시절>은 하나의 주장을 하고, 이에 맞는 근거를 들어서 논지를 확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신과적 양상을 병열식으로 보여주었다.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를 강조하기보다 많은 양상을 동일한 분량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읽기에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토론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회원 각자 자신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었다.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인생에 리허설이 없다는 말은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아주 오래전에 결정된 당연한 귀결보다 반전의 순간이 많이 일어나기를. 나는 커다란 힘이 이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이끌어가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책: <몸에 밴 어린 시절>

저자: W. 휴 미실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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