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퇴근하고 선배님과 술 마시기 싫습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회사 선배들이 퇴근하고 술 한잔하자는 카톡이 두렵다. 자유로웠던 대학시절에도 맥주 한잔 마시자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기숙사에 남았을 정도니 술맛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진짜 친한 친구들과는 가끔 홈파티나 조용한 와인바에서 와인을 마시고 그 외에 술을 마시는 모임에는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내게 술 마시자는 사람도 없다. 감사하게도 내가 다니는 회사는 술을 마시는 회식문화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술을 마시는 자리가 없는 것뿐인지 술을 좋아하는 직원들은 있기 때문에 비공식적 술자리는 존재한다. 특히나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자주 술 한잔 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단순히 친한 후배를 넘어 동생처럼 생각하시어 술자리를 만든다는 건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부담스럽다. 좋은 의도로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동기도 후배도 아닌 선배님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더욱이 지속된 거절은 내가 상대방이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사표현으로 보여 섭섭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내가 상대를 덜 친하게 느끼는 게 맞을 것이다.) 설사 동일한 수준으로 서로 친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는 그 정도 친분으로는 카페 가서 커피 한잔이 적당하다고 생각해도 애주가는 술 한 잔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술 한잔하는 사이'에 대한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거절하기 힘든 회사 선배의 ‘술 한잔 하자'가 정말 싫다.
"집도 가까운데 언제 한번 그 근처에서 보자."
"언제쯤 보니 우리?"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담감을 느끼는지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척을 할 걸 그랬나 싶을 때도 있다. 특히나 직원들과의 비공식적인 술자리는 개별로 돈을 내서 먹는데 굳이 퇴근 후에 집도 못 가고 내 돈 내고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고역인지 모른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은 이게 꼭 필요한 '화합'의 장이라고 믿고 있고 주기적으로 술 한잔 하며 ‘회포’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는 딱히 부담스러운 정도로 술자리를 만든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직에 한 명씩 있는 애주가 선배와의 술자리 기억은 내게 회사 사람들과의 술 모임에 대해 더 진절머리 나게 만들었다. 사적인 관계라면 술자리가 싫으면 안 나가면 그만이지만, 공적인 사람들의 제안에 대해서는 칼같이 끊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일도 봐야 하는 회사 선배고 도움받아 감사한 선배일수록 술자리를 거절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 번은 애주가 선임 선배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서 퇴근하고 갔더니 나 혼자 뿐이어서 20살 많은 남자 선임 팀장님과 단둘이 삼겹살을 먹었다. 술도 못 마시는데 어색한 그 분위기가 불편해서 계속 원샷하다가 오는 길에 토하고 난리 났던 경험이 있다. 그 이후에 또 다 같이 모이자고 해서 술자리를 가지는데 원샷을 안 하면 눈치 주는 애주가 선배 덕분에 과하게 마셨다가 집에 혼자 오지도 못해 엄마가 데리러 오신 적도 있었다. 좋아하시도 않는 술을 마시고 택시 타고 겨우 집에 오느라 몇 만원씩 쓰고 과음해서 다음날 머리도 아프고 불편 자리에서 즐거운 척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고문인지 모른다.
특히나 회사에서 직원 간에 술자리를 금지하고 있는 곳에서도 이러니 그렇지 않은 회사에서는 얼마나 심할까란 생각도 든다. 최근에 한 주임급 직원이 퇴사하면서 상사가 술자리를 갖게 한 것을 인사팀에 말해서 해당 상사는 징계를 받은 사례가 있었다. 그걸 보고 애주가 선배는 "치사하게 그걸 찌르고 가다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고 말하더라. 반면 나는 '얼마나 그 상사가 괴롭혔으면.. 그리고 특히나 회사에서 리더로 삼은 사람이 저렇게 술 모임을 가지다니.'이란 생각을 했으니 얼마나 동상이몽인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술을 억지로 마셔야 하는 그 모임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애주가일수록 공적인 관계에게 '술 한잔 하자'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친구들과 드시거나 서로 술자리에 합의하는 동기나 술 좋아하는 후배에게나 제안하셨으면 좋겠다. 본인은 친분이라고 믿겠지만 밑에 사람에게는 술 좋아하는 상사 덕분에 퇴근 이후 자유시간을 빼앗기고 겪는 고생일 뿐이다.
술자리에 대한 거절이 빈번해질수록 해당 선배도 나에게 서운함을 느끼겠지만 나도 속으로 얼마나 꼰대라고 생각하지는 모른다. 고마웠던 마음마저도 접게 만드니 말이다. 새해인사를 하려다가도 괜히 연락했다가 술 마시자고 할까 봐 아예 카톡도 하지 않게 된다. 설사 멀어지더라도 술자리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술 좋아하시는 분들, 제발 회사에서 후배들한테 술 마시자고 하지 맙시다! 후배들은 퇴근하고 집 가서 쉬고 싶어요. 술은 친구랑 드세요 제발.
(다음 회사에서는 술 못 마시는 척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