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늘직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작가 Feb 05. 2024

나의 대학 시절 그리고 직딩으로

살아온 32년, 살아갈 32년 [6]

오랜만에 브런치스토리에 등판을 한다. 매주 월요일 글 한 편씩은 올렸는데, 최근 이런저런 일로 연재를 하지 못했다. ‘살아온 32년, 살아갈 32년’ 늘작가의 두 번째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한다.


다섯 번째 글은 시계를 호랑이 담배 피웠던 시절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벌써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84년 2월 중순, 남녁 끄트머리에서 이불 한 보따리와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노량진 대성학원에 재수하러 올라왔다. 겨울에 눈 한번 볼 수 없었던 촌놈에게 서울의 2월 중순 날씨는 너무 추웠다. 녹녹지 않았던 재수생 시절을 우여곡절 끝에 (중략... 재수생 시절 에피소드 이야기하면 한 권 분량이다^^),  1985년에 SKY대학 중 한 곳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라떼의 대학 캠퍼스는 “군부독재 타도, 민주화”를 외치는 소리와 짱돌과 화염병이 일상사였었다.  대학생 초기에는 이념서클에 가입하고, 데모 = 민주화 운동 선두에 섰다가, 고향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운동(?)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그렇다고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고, 중간 지대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었다. 그러던 중 1987년 그 뜨거운 서울의 봄을 온몸으로 맞이하였다. 6월 항쟁 그 한복판에 나도 있었다.


6월 항쟁 (출처 : 모름)


이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고, 아프고, 뜨겁고, 차가웠던 시절이었다.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부모형제와 고향/대학 친구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아마 앞으로도 하기 힘들 듯하다… 중략… 지금 이때 함께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동료/선후배들이 지금 이 나라 최고 권력자들이 되었다. 소위 586세대 정치인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대학 다닐 떼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명동성당에서 그렇게 외치면서 타도 대상으로 했던 그 군부독재 정치인들보다 지금 당신들이 나은 것이 뭐가 있냐고? 낫긴 개뿔. 더하면 더했지 ㅋ


그러니깐 여야를 막론하고 586 정치인들은 처절히 반성하고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서 후배들에게 이 나라를 맡기길 바란다. 당신들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참 나쁜 사람들이다.




암튼, 나는 온몸으로 1987년을 보낸 후 이듬 해인 1988년 입대를 했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하여 정신 차리고 죽을힘을 다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군대 가기 전에 *판이었던 학점을 높이기 위해서 재수강까지 하면서 열공한 결과, 복학 후 학교 졸업할 때까지 모두 장학금 받고 다녔다. 개인 과외 하면서 생활비도 내가 벌면서 대학 졸업을 했다.


9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네가 만약 해외 유학 원하면 미국 하와이에 친한 분 계시니 그곳에 가서 석사나 박사 받아라.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라도 뒷바라지해 주겠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셨지만 나는 우리 집 사정을 아는지라 “아버지 괜찮습니다. 저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해서 돈 벌 겁니다” 이렇게 하고 취업 목표를 언론사로 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언론사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라 ‘언론고시’로 불렀다. 그래서 군대에서 복학한 학과 친구들과 함께(나 포함 총 6명) 언론사 시험공부를 위한 스터디 그룹을 짰었다. 당시 멤버 중 한 사람이 늘작가가 이야기한 제주도 학과 친구였다.^^ 6명 중에 2명이 언론사에 합격을 했고, 나는 언론사 1차 시험에는 몇 번 합격을 했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대학 졸업 하기 전 일반 회사 합격도 되었지만, 언론사에 꼭 들어가고 싶어서 취업 재수까지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언론사는 계속 떨어지고(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최종 합격을 하게 되었다. 이 회사도 처음이 아니라 두 번째 응시하여 합격을 한 것이다.


회사 합격증


당시에는 합격 통지를 이렇게 우편으로 보내었다. 개인 핸드폰도 없었고, 연락처라고는 하숙집 전화번호뿐이었던 라떼는 시절. ㅎ



그래 기억이 난다. 이 합격 통지서를 받고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었다. 너무나 들어가고 싶은 회사여서.  합격통지서에 있는 '국내 제일의 회사'가 이제는 '글로벌에서도 랭킹 10' 안에 들어가는 회사로 성장을 하였다. 이때 이 회사 사장이 되겠다는 야무진 각오도 했었다. 그렇게 늘작가의 사회인, 직장인 삶은 시작되었다.


오늘 글은 여기까지이다.  To be Continued ^^


대학교, 캠퍼스 전경





매거진의 이전글 부장 팀원으로 지낸 3년(4년 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