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깍두기
배추김치가 떨어졌을 때, 배추김치 담을 시간이 없을 때 휘리릭 만들어 빨간 한 접시로 식탁에 올리는 것이 우리 집에서는 깍두기다. 간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두 시간 정도면 끝낼 수 있으니 김치가 없을 때 비상 김치처럼 만들어 먹을 수 있어서 식탁에 깍두기가 오르면 요즘 엄마는 바쁘다는 사인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집 깍두기는 남편 작품이기도 하다.
남편은 평소에도 요리를 즐겨하는데 그만의 고유 메뉴가 있다. 김치볶음밥, 짜장면, 카레.
이 세 가지 메뉴는 남편 손맛을 따라갈 수 없어서 아예 나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남편의 손맛도 손맛이지만 내 손에서 메뉴 세 개를 덜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은 속셈이 있기도 했다.
언젠가 너무 바빠서 김치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집안 일도 챙기지 못할 때 남편은 유튜브를 검색해가며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맛이 제대로였다. 그 후로도 몇 번 남편의 깍두기는 식탁에 올랐고 김치가 아쉬울 때면 늘 빛을 발하곤 했었다.
힘들지 않으려면 간단하게 주문만 하면 될 텐데 그게 참 안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집에 김치가 똑 떨어졌다. 김장 전까지 먹을 요량으로 "깍두기 좀 만들어주지?" 말을 건네 보았지만 남편은 피곤한지 반응이 미지근하다.
"그래, 쉬어. 내가 해보지 뭐."
남편의 훈수를 들으며 깍두기를 담기 시작했다.
무를 썰고 천일염을 살짝 뿌려서 30분쯤 두었다가 채에 바치고, 양파 하나쯤에 새우젓 조금 넣고 믹서에 갈아서 붓고 고춧가루와 마늘과 생강, 쪽파를 넣어 버무리다 약간의 액젓과 소금으로 간하면 끝이다.
참, 단 맛과 숙성의 비법으로 요구르트 하나 부어주면 잘 익었을 때 설렁탕 집 깍두기 맛이 제법 난다.
잘 버무려 놓으니 색이 참 곱다.
우리는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을 깍두기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편이 됐다가 상대편이 됐다가 하더라도 지장 없는 존재.
우리 집 깍두기는 메인 김치로 대접받지는 못하지만 아쉬울 때 빛나는 똑똑한 깍두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