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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an민산 Nov 13. 2022

흰 밥을 물에 말아 곁들이다

- 갓 물김치

나는 안동 집안 종갓집 외며느리이자 맏며느리이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이 아이가 반드시 아들이어야 출산의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여겨졌다. 시댁에 함께 살고 있던 나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았지만, 아니 무언의 기대가 무겁기는 했었다. 다행히 첫 손주를 장손으로 안겨드린 내가 네 시간 만에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병원에는 오촌 아재들까지 집안의 어른들이 다 모여계셨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남편은 내게 말했다.


"이제 피박은 면했어~"


첫 아이는 아버님의 기쁨이었고 나는 밥 먹듯 하는 야근과 철야에도 아버님의 든든한 응원 속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둘째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버님 역시 첫 손주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셨다. 큰 아이가 9살이 되는 해 설날 새배를 드리는데 덕담으로 처음 둘째 이야기를 꺼내셨다. 단 한마디로.


"나중에 얘 혼자 외롭다."


그해 봄 아버님은 심장 수술에서 회복하지 못하시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물려받고 회사 다니며 기제사 지내며 명절 차례상 차리며 슈퍼우먼이 되어갔다. 


막 40세가 되었을 때, 나와 남편의 모든 사회활동이 실패하고 멈추었을 때 처음으로 짐이 아니라 힘이 되는 아기를 주시면 좋겠다는 기도를 하게 되었고 그 기도는 생명이 되어 12년 만에 둘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 암담한 시절에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시커먼 파도를 나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출장길에서 맛보았던 갓 절임이 너무 먹고 싶었다. 갓을 자작한 국물에 절인 톡 쏘는 맛에 개운하고 밍밍한 갓 절임. 그걸 먹자고 일본을 갈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그거 한 접시만 먹으면 속이 뚫리고 힘이 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여수의 지인이 보내줬다며 다시 내게 토스해준 갓 물김치 한 봉지.


일본의 갓 절임처럼 짜지도 않고 가쓰오부시의 들큼한 맛도 없이 깨끗하고 잔잔한 바다를 먹는 것 같았다. 갓 물김치를 곁들여 다시 밥을 넘길 수 있었고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힘내자, 힘내자' 다시 희망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렇게 41세에 얻은 늦둥이 둘째 아들. 

이 아이가 곧 수능을 치른다. 말 좀 안 들어도 공부가 뛰어나지 않아도 이쁘고 고맙기만 하다. 우리 집 시련의 역사였고 희망의 힘이었던 이 아이의 썸네일 어딘가엔 갓 물김치 한 접시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입덧이 심했던 한 여름이 되면 지금도 흰 밥을 물에 말고 갓 물김치를 곁들인 소박한 밥상이 더없이 꿀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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