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아이를 키우는 아빠는 왜 보이지 않지?
찐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장애를 없애려는 거였다. 관련된 기사를 읽고, 책을 읽고, 장애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SNS에서 만나며 장애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찐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꽤 긴 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장애 아이를 키우는 아빠들은 기사나, 책, SNS에서 만나기 굉장히 어려웠다.
비장애인 형제들의 자조 모임인 '나는'에서 만든 책 <나는, 어떤 비장애형제들의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가넷 _ 지금까지 부모님과 나에 대해서 얘기했는데요. 아무래도 주 양육자가 주로 엄마이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아빠에 대한 얘기는 적은 것 같아요. 다들 집에서 아버지와 관계는 어떤가요?
나비 _ 음. 그다지 아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요. 집에서 아빠는 어딘가 소외된 느낌이긴 해요. 퇴직하고 나서 집에 많이 계시긴 하는데요. 아빠는 동생에 대해선 어딘가 소극적이었어요. 동생을 아끼는 것 같은데, 막상 동생의 미래나 직업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말이 없어져요. 엄마와 함께 두 분이 열심히 저희 둘을 키우신 것 같긴 한데, 돌이켜보면 왠지 아빠에 대한 인상은 희미해요.
겨울 _ 맞아요. 정말 아빠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요. (웃음)
써니 _ 오빠든 저든 주 양육자가 엄마여서 그런지, 엄마에 비해 아빠와는 유대관계가 깊은 것 같지 않아요. 특히 제가 어렸을 때 아빠는 오빠의 장애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빠들은 보통 그렇잖아요.
삼각형 _ 저희 아버지도 인정하지 못하셨어요. 오빠에게 끝이 올 때까 지도,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장애가 없다고 정말로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메이 _ 우리 아빠도 지금까지도 그래요.
가넷 _ 저희 아빠도 동생의 장애를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리셨어요. 웃기네요. 아빠들은 다 왜 그럴까요?
정말 아빠들은 다 왜 그럴까?
찐이의 수술 일정이 잡혔다. 부장에게 보고를 하고 휴가를 내야 했다. 그때 갑자기 전무가 끼어들었다.
전무: 아! A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부장: 네. 작년에 그룹 전체 총간사를 따냈습니다. 그룹의 절반만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전부다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전무: 음. 잘 되었구먼. 담당자가 누구지?
부장: 네 이 과장입니다.
전무: 좋아. 총 간사 이후 일정을 어떻게 되는 거야?
부장: 네. 그쪽 인사, 재무 부사장에게 브리핑이 2월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전무: 그래. 나도 참석할 테니 잘 준비하라고. 브리핑은 누가 하지?
부장: 네 이 과장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참담했던 건 브리핑 일자가 찐이의 수술 날짜와 겹쳤다는 거였고, 더 참담했던 건 내가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거다. 전무의 차를 타고 고객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문자를 확인했다.
"찐이 지금 수술실 들어갔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스마트 폰을 든 손이 떨렸다. 병원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혼자 대기실에 남아있을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다. 죄책감과 슬픔에 심장이 뛰었다. 그럼에도 이 브리핑을 잘 해내야만 하기 위해 감정 조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프로니까,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말이다.
일요일 밤. 찐이가 경련을 했다. 응급실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잠이 들자 다음 날 오전에 있을 '경쟁 프레젠테이션'이 떠 올랐다. 아침 6시에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옷을 갈아입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경쟁 프레젠테이션 장소로 갔다. 레드불을 하나 마시고.
아빠도 힘들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든 것을 감내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배웠다. 그들의 아빠가, 학교가, 사회가 압박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힘들어서는 안 된다고, 힘들더라도 숨겨야 한다고, 울음을 삼켜야 한다고.
잘못됐다. 완전히 틀렸다. 슬퍼해도 된다. 힘들어도 된다. 울어도 된다. 충분히 슬퍼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이고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용기가 없다. 사회가 정해놓은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올라서서 위태하게 위로 올라갈 길만 바라보고 있다. 남들이 정해 놓은 강함의 기준에 굽실대며 사다리에 매달려있다. 이 사다리에서 내려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낼 용기가 그들에겐 없다. 강한 척 하지만 제일 약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듯 하지만 어떤 것도 내려놓을 용기가 없는 위선적인 존재 아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표현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불쌍한 아빠. 슬퍼하는 것이 먼저다.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 흘릴 수 있다면 내려놓고 받아들일 수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지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이 글의 앞에 나온 비장애인 형제들의 이런 대화는 없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