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아틀리에'라 부를 수 있었던 공간은, 대학 시절 음악과 건물 지하 1층에 자리했던 작은 연습실이었다. 업라이트 피아노가 벽 한편에 놓여 있었고, 여름이면 습기 가득한 공기 속에서, 겨울이면 결로 묻은 벽면을 따라, 낡은 마룻바닥은 한 걸음마다 삐걱거림으로 시간을 눌러댔다. 피아노 옆엔 커다란 전신 거울이 붙어 있었고, 오래된 방음 타일 사이사이로, 수많은 흔적들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뒤로 흘러가거나 앞으로 돌진하는 감각이 반복됐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거쳐갔을지 모를 공간에 앉아있다 보면 가끔은 시간이 무한으로 흐르는 듯했다. 이 조그만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들을 떠올린다. 아틀리에, 연습실 혹은 작업실을 잘 고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각기 크기도 위치도 역사도 다른, 나의 창작과 성찰 그리고 훈련의 공간을 어떻게 하면 잘 알아볼 수 있을까? 지난 10년간 서울-파리-뉴욕을 거치며 각 도시의 다양한 아틀리에에 다녀보면서, 이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간이 나를 선택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습실을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 루틴, 감정의 결을 받아줄 공간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어떤 공간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고, 어떤 공간은 묘하게 침묵과 마주하기에 딱 알맞고 아늑했다. 파리에 있던 친구들의 아틀리에는 창이 컸고 케케묵은 오래된 가구들이 놓여 있었거나, 좁지만 매우 희한한 구조로 창고 겸 쓰이기도 해 악기와 장비들이 빼곡히 쌓여있기도 했다. 뉴욕의 스튜디오는 소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게 만들었다. 월세가 높은 지역이라 집을 개조해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서울에서는 대개 고시원에 가까운 협소한 공간도 또는 한 몸을 뉘일 수는 있었던 정도로 크기는 작았고, 아늑했다. 어떤 장소는 처음부터 낯선 옷처럼 껄끄러웠고, 어떤 공간은 침묵과 마주하기에 이상할 만큼 포근했다. 고시원의 협소함, 파리의 광활한 창, 뉴욕의 몸이 먼저 반응하는 진동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작업실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태의 나를 수용해 줄 수 있느냐’에 따라 불려지는 존재라는 것을.
아틀리에는 종종 나의 감정을 먼저 알아채는 존재처럼 다가온다. 반듯하거나 완벽할 필요는 없다. 벽의 균열과 마루의 삐걱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내가 어떤 시간을 쌓아가느냐는 것이다. 그곳은 성공을 위한 도약대가 아니라, 실패를 반복할 수 있는 안전한 바닥. 나의 의심과 게으름, 두려움과 반복을 담았다가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 공간. 거울 앞에 앉아 나를 설득하고, 무너졌던 마음을 다시 꺼내어 붙잡는 곳. 어떤 날은 마음이 물러지고, 어떤 날은 단단해지는 이 리듬 속에서 나는 나를 계속 알아갈 기회를 성찰하게 된다.
불완전하고 낡은 공간에서도 연습은 가능하다. 중요한 건 마루의 삐걱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시간을 어떻게 쌓아가는가이다. 그리고 때로는 연습실이 성공을 위한 도약대가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기 위한 안전한 바닥일 수도 있다. 나의 두려움에 관한, 연습과 반복적인 훈련에 관한 올곧은 믿음, 그리고 게으름까지, 모든 것을 내뿜고 다시 한숨처럼 빨아들이는 공간. 자신과 매일같이 싸우고 또 지고, 웃고 울고, 텅 빈 거울 앞에 앉아 다시 나를 설득하는—그런 나만의 장소.
우리가 쓰는 글, 그리는 그림, 연주하는 선율이 똑같을지라도 매일의 감정과 온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영감과 기획, 실행의 경계가 흐려질 때, 피아노 앞에서 집중하던 나는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뚜껑을 닫는다. 머릿속 반짝이는 문장이 무대의 조명이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낙서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람은 경험한 만큼 알 수 있고, 쓸 수 있다. 어디까지가 영감이고, 어디까지가 기획이며 실행일지 자문하다 보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도 생기고, 문득 멋진 멜로디가 완성되기도 한다. 피아노 앞에서 집중해 연습을 하다가도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피아노 뚜껑을 닫고 몇 시간을 쉼 없이 글을 써 내려간 적도 있다.
오늘도 나는 되고 싶은 내가 아니라, 존재하는 나를 훈련한다. 그래서 아틀리에는 결심을 다지는 장소라기보다, 흔들림을 견디는 장소에 더욱 가깝다. 악보 위의 음표처럼 오늘도 익숙한 루틴을 반복하지만, 마음은 매일 다르게 흔들리고, 몸은 늘 다른 방식으로 아프다. 창작은 언제나 계획보다 더디고, 감정보다 냉정하며, 현실보다 덜 유연하다.
집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있어 차로 10분즘 걸리는 아틀리에는 지난 겨울에 구한 신축 연습실이었다. 지하인 아틀리에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계단 아래로 이어진 어두운 통로가 펼쳐진다.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면, 복도와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 눈앞에 나타난다. 소복히 쌓인 어젯밤의 적막의 층을 걷어내듯 피아노와 책상 위의 먼지를 턴다. 의자에 앉아 작은 숨을 내뱉는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의 공간에서 묘한 긴장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작업 노트북을 열고, 스피커를 켠 후, 루틴대로 니콜로 바카이의 Practical Vocal Method 다장조 스케일 연습곡 제1장을 튼다. 보컬 멜로디가 첨가된 버전, 베이스, 미디움, 높은 보이스 다양한 버전을 때에 따라 마음이 가는대로 듣는다.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미디움 보이스를, 몸이 가벼운 날에는 높은 보이스를 트는 등 여러 스케일의 버전으로 틀어 수백 번 익힌 귀에, 또 한 번 흘러들게 놔둔다. 바카이를 처음 배운 건 파리의 낡은 레슨실에서였다. 이 아틀리에에서 그때의 공기와 발음을 다시 불러낸다.
프랑스어와는 또 다른 이탈리아어의 질감. 그건 단지 언어가 아니라, 나에게 어떤 태도의 리듬을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발음 하나를 정확히 내기 위해 반복했던 그 시간들. 지금 이 연습실에서 그 기억을 다시, 천천히 입 안에서 굴려본다. 영어, 프랑스어와는 다른 발음과 악센트로 또 다른 힘이 깃들어 있어 긴장이 서린다. 발성연습은 언제나 나를 현재로 데려온다. 목 안 깊숙한 곳에 쌓인 긴장을 풀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다른 감각이 열린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루틴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나를 붙잡고 확장시키는 매개채이다.
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더 많이 연습하고, 기록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습이 아닌, 나에게 정직해지기 위한 연습이 가능한 공간. 어느 날은 발성을 하다 글을 쓰게 되고, 어느 날은 글을 쓰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아틀리에는 창작의 선후가 뒤섞이는 실험실로, 나를 통제하는 공간이 아니어야 한다. 나를 되살리는 공간인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다움이 무엇인지 찾아갈 수 있다. 이 작은 은신처가 나를 안아주는 동안, 나는 나를 조금 더 믿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