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팀장 R

by 빵글

R이 팀장으로 있는 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R은 직원 중 유일하게 신입부터 계속 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관장과 부장이 각별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R은 J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조용조용하고, 언제나 평화주의자였다. J가 싸움닭 느낌이라면 R은 들판 위의 소녀였다.



명예를 회복하리라


민족 대명절 추석이 가까워지며 내가 처음 준비하고 대차게 망쳐버린 설 명절 행사의 악몽이 살아나고 있었다. 새로운 팀에서 진행하는 추석 행사는 정말 잘 해내리라! J에게 나는 내 역할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말리라! 그렇게 주말도 반납하고 자료조사를 하며 행사를 준비했다. 늘 같은 형식의 행사가 아니라 색다르고, 다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를 담아 큰 규모의 행사로 기획했다. 몇몇 직원은 괜히 일을 복잡하게 한다며 한 소리씩 했지만, R은 나를 격려했고 세심하게 행사 준비를 함께 해주었다.

추석행사 마무리 그리고 J

행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새로 기획한 행사는 마을 내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고 참여한 모든 이들이 만족했다.

행사 후 J가 다가왔다.


“이제 잘하네~! 빵!! R 팀장이랑 잘 맞나 보다.”


J는 진심으로 칭찬했고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이 사람, 지금 나에게 미안하구나’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J의 미소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 팀장님 이젠 잘할 때가 됐죠-”

“그래~ 빵! 잘 해야지.”



팀장으로서의 R


R 팀장은 뭐랄까. J와는 너무나 달랐다.

J는 방향성이 우선이라면 R은 절차와 형식이 우선이었다. 띄어쓰기, 맞춤법, 양식에 대한 피드백이 항상 주로 이루어졌다. 기본 양식이 맞춰지지 않으면, 사업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듣기 어려웠다. 배려심도 많고, 마음도 약해서 우유부단했다.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했고, 이미 내린 결정도 갈팡질팡하는 일이 꽤 있었다. J의 모습에 익숙해진 탓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R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람으로서는 좋았지만 아직 배울 것이 많았던 나는, 팀장이 더 팀장답게 더 리더답게 팀을 끌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쌓이고 있었다.



커져가는 J 작아지는 R


가장 선임 팀장이었던 M이 휴직을 낸 이후, 기관 내 J와 R의 역할이 커졌다. J는 언제나 진취적이었고, R은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R이 나서지 않는 일을 J가 도맡아서 하면서 기관 내에서의 J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고, R은 작아졌다. J는 R의 수동적인 태도를 매번 지적하며 싫어했다.

점점 작아지는 팀장, J에게 무시당하는 R의 모습을 보며 속상했다. 왜 R은 나서지 않는 것인지, 그래도 J보다 오래 근무했는데 저렇게 무시 받아도 괜찮은 건지, 원래 욕심이 없는 성격인 건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팀장은 팀원 사업을 잘 알아야 하는가


J의 팀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던 사업이 나한테 이관되었다. 중요한 사업인 만큼 꼼꼼하고 철저하게 인수인계가 진행됐다.

J는 인수인계에 참여하지 않는 R의 태도를 지적했다.


“중요한 사업인데, R팀장은 왜 인수인계 안 받아요?”

“담당자가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팀장이 사업 내용을 알아야 피드백을 주죠.”

“팀장이 팀원 사업을 하나하나 다 알아야 하나요?”


가벼운 설전이 오갔다. 그 사업이 처음 J팀에서 시작될 때를 기억한다. D 선임이 담당이었지만 관련 설명회나 회의에 J가 언제나 함께했고 사업을 논의하며 방향성을 같이 잡아갔다. 하지만 R은 달랐다. 각자 자기 사업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큰 틀만 팀 내에서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중요한 사업을 맡았다는 부담감과 팀장에게 깊이 있는 피드백을 받고 싶었던 나는 R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팀장이라면 J의 태도가 맞다고 생각했다. 팀원의 사업을 꼼꼼히 알고, 같이 고민하고, 피드백을 주는 팀장. 추후 나도 그런 팀장이 되길 바랬다.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쓰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게 정말 괜찮은 팀장인가?’


세심하게 팀원의 사업을 챙기는 팀장. 그래서 팀원의 사업 하나하나 다 알고 있는 팀장이라면, 팀장의 역할과 담당의 역할이 구분될 수 있을까? 그게 정말 팀원을 위한 건지 팀원을 잘 챙기고 싶은 팀장 본인의 욕심은 아닌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R이 J처럼 사업의 내용을 자세히 알았다면, 나는 그 사업을 주체적으로 실행하지 않았을 것 같다. 경험도 적고 두려움도 많았던 나는, 사업 내용을 잘 아는 팀장에게 많이 의지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말 R이 그런 것을 생각해서 J의 인수인계를 거절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일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 거절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덕분에 한 사업의 담당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M의 복귀


약 1년이 지나 M이 휴직을 끝내고 복귀했다. M은 차분하고 능수능란하게 팀장 간의 균형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너무나 작아진 R을 격려하고 배려하며 키웠고, 너무나 커진 J를 적절하고 합당하게 눌러갔다. 균형이 잡히니 잡음이 사라졌다. M의 능력이었다.

J는 얼마 가지 않아 퇴사했다. 정말 다른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한 건지, M에게 밀린 자기 자신이 보기 싫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6+6+6=18


시간이 지나 팀의 사업 방향이 바뀌면서 6개의 기관과 연합으로 학술 세미나를 준비하는 사업을 맡게 되었다.

세미나를 준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각 담당자와의 소통도 소통이었지만 6명의 팀장, 6명의 부장, 6명의 관장이 다 합의를 이끌어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18이었다.

두 기관씩 팀을 이뤄 3개의 사례를 발표하기로 했다. 우리 팀은 내 사례로 발표하기로 해서 내가 더 신경 써서 준비해야만 했다.

사례세미나는 항상 우수 사례 발표 형식이었는데, 많은 전문가와 유관기관이 참석하는 행사에 왜 항상 성공 사례만 발표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진정한 배움의 장으로써, 오히려 부족했고 어려웠던 사례를 공유해서 함께 해결해 나가는 그림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담당했던 사례 중 실패한 사례를 선정했다. 자칫 기관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사례 발표였지만, 우리 기관의 부장과 관장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빵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너무나 안타까웠고 어려웠던 사례, 담당자 혼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구성하여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해결하자는 취지의 발표문이 완성되었다.



중간 점검


중간 점검이 시작되었다. 6명의 담당자, 6명의 팀장, 5명의 부장이 모였다. 우리 부장은 외부 일정으로 방문하지 못했다. 준비한 사례를 발표하고 피드백을 들었다. 부장들의 신랄한 평가에 담당자들은 위축되었고, 분위기는 험악해져만 갔다. 드디어 우리 팀 차례. 그나마 다른 팀보다는 좋은 평을 들었지만, 마지막 대사를 바꿔서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기관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피드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표 방향이 틀어지고, 진실을 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꾸기는 좀.. 실수를 어설프게 가릴 수는 없어요.”


더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R이 나섰다.


“네- 내용 바꾸겠습니다.”


R은 상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적이 없었다. 부당해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사의 피드백은 바로 순응하고 받아들였다. 이번 부장들의 피드백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R은 받아들였다.

서운했다. 그래, 일개 직원, 일개 사원 따위가 부장 직급의 피드백을 어떻게 거부할까. 하지만 우리 기관의 사례였다. 팀원의 이야기를 조금 들어주고 같이 설득할 노력도 하지 않는 R에게 서운하다 못해 미운 감정까지 들었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은 J였다.


‘J라면... J가 팀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왜인지 모르게 J는 내 편을 들어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J가 그리워졌다. 신입이 아니라 지금쯤 J를 팀장으로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한 줄 바꾸는게 뭐가 어려워


복귀한 나는 딱 한 줄. 그 한 줄을 수정하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수정할 수가 없었다. 그 한 줄은 발표의 전부였다. 이걸 바꾼다면 거짓으로 세미나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R과 이야기를 다시 나눴지만 R은 번복할 수 없다며 그냥 부장님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내가 부장님들을 설득하겠다고 했지만, 괜히 일 키우지 말라는 말로 끝났다. 나와 같은 팀의 담당자도 수정하고 끝내자고 했다.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이 무색하게 손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위에 앉아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왜 딱 한 줄인데 수정하지 못하지? 왜 팀장은 내 편이 아닌거지?’


배짱 있게 말도 못 꺼내면서 수정도 못 하는 내가 한심해서 한참을 울었다.


“빵~”


천장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M이 옆 칸에서 변기를 밟고 서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야? 왜 청승맞게 거기서 울고 있어!”


M은 나를 화장실에서 불러내어 휴게실로 데려갔다. R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서러움과 눈물을 삼키며 이야기했다. 차라리 우리 부장이 고치라면 고치겠지만 그것도 아닌데 왜 타 기관 부장들의 말에 수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설명했다.

M은 조용히 끄덕였다.


“알겠어요. 빵 마음 충분히 알겠어! 내가 말해볼게. 울지마 좀! 사무실에서 울던가! 변기에서 울어 왜!”



변기 위에서 지켜낸 한 줄


다음 날 M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R과 이야기를 했고, 부장과 이야기를 했다. 그 결과, 수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6+6+6이 모두 합의되어 결정되었다. R이 하지 못한 일을 M이 해주었다.

일개 사원은 그렇게 똥고집을 부려 마지막 한 줄을 지켜냈다. 사례세미나 당일 3개의 사례 중 우리 팀 사례가 가장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뜨거웠다.



올라간 콧대


누르면 폭-하고 들어가는 낮은 콧대가 성공적인 추석 행사와 연합사례세미나로 인해 한껏 높이 올라섰다. 굽어진 거북목도 빳빳하게 세워졌고, 말린 어깨도 쫙-펴졌다.

어느새 R은 의욕 없고 소신 없는 팀장이 되었다. R은 처음과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건 R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그 이후 R과는 일에 대한 깊은 고민을 나누지 않게 되었다. 팀장 R보다 부장을 찾아가는 일이 더 잦았다. 친하고 화목한 팀이었지만 어딘가 거리감이 있었고, 어쩌면 내가 R보다 더 낫다는 오만함이 어깨에 실렸다.



R의 휴직


R은 출산+육아를 위해 휴직계를 냈다. 미소와 함께 나를 응원했다.


“빵은 걱정 하나도 안 돼. 든든한 팀원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우리 팀 잘 지키고 있어!”


팀을 잘 지켜달라고 했던 R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첫 팀장 J의 강렬한 인상은 R을 지극히 평범하고 욕심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욕심에 나도 태워졌으면서, R도 더 뜨거워지기를 바랬다.

R은 리더십이 부족했지만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욕심이 없어서 위로 올라가지는 않아도, 절대 일을 못하는 팀장은 아니었다. 무난한 팀원이라면 함께하기 좋은 상사였다. 하지만 내 의욕은 R보다 앞서있었고, 욕심은 J와 더 가까웠다. R은 나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아쉬운 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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