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팀장 E

by 빵글

팀장 J와 R이 줄줄이 퇴사하고 팀장 M만 홀로 남았다. 그로 인해 대규모 인사이동이 일어났다. 선임인 E와 Y가 팀장으로 승진했고 나도 선임으로 승진했다.

연합 세미나가 너무 힘들었기에 다른 업무를 하고 싶었다. 결국, 세 개의 팀 중 가장 업무가 많은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모든 팀을 다 경험하고 싶은 내 욕심과 이제 갓 팀장이 된 E와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E중에도 슈퍼 E


E는 엄청나게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직원 중 웃음소리가 가장 크고, 가장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매우 외향적인 E성향(MBTI의 E)을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자주 깜빡하고 허둥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건 E가 가져온 성과에 흠 하나 낼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직원 모두가 성격 좋고, 일도 잘하는 E를 좋아했다. 나도 업무상 E와 함께 협력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성향도 잘 맞고 시너지도 좋았다. 그런 E와 함께 팀을 한다면 너무 좋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E도 나와 함께 일하는 걸 무척 기대했고 잘할 수 있을 거라며, 서로 잘해보자며 결의를 다지곤 했다.



직원이 필요해


E는 입사 이후로 계속 같은 업무만 했기에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팀장으로 직급이 바뀌더라도 허둥지둥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에는 한 자리가 비어있었고, 업무가 많고 고된 팀이었기에 빠른 인원 충족이 필요한 상태였다. 앞으로 다가올 산더미 같은 업무를 E와 내가 단둘이 해결하기에는 벅찼다. 채용을 위한 면접과 인수인계의 과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내가 입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수인계만 하면 다음 날 출근하지 않겠다는 문자가 날라왔다. 여러 번 그 과정들이 반복되자 결국 관장이 움직였다.


“괜찮은 사람을 추천받아야겠다.”


아니 이 사람은?

일찍 출근한 어느 날 E 팀장의 책상에 이력서 하나가 있었다. 관장이 퇴근하면서 올려놓은 것으로 보였다. 호기심에 슬쩍 내려다본 이력서. 익숙한 얼굴이었다. 곧 E가 출근했고 다급히 이력서에 관해 물었다.


“팀장님! 이 사람이 추천받기로 했던 사람이에요?”

“어- □□기관 부장님이 소개해 준 사람이야. 넌 잘 알겠다! 같은 학교 후배잖아.”

“.......아.....팀장님.. 그냥 다음 채용 때까지 우리끼리 하면 안될까요...?”

“뭐야- 이 사람 별로야?”


이력서에 있던 사람은 학교 후배 T였다. 같이 동아리 활동도 했었고, 내가 직속 후배로 담당했었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흐지부지 동아리를 그만두고 흐지부지 군대로 가버린 그 후배. 동아리를 매우 아끼고 소중히 여겼기에 무책임하게 탈퇴하던 후배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내 기억 속 T는 똑 부러짐과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빵. 안돼- 우리 둘이서는 절대 못 해. 내가 이 팀에서 몇 년인데. 우리 사람 없으면 힘들어 지금.”

“아니! 그래도 가르치는 데 시간을 배로 쓰게 되면 우리 둘이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그 정도야? 부장님이 괜찮다던데...”

“뭐 군대 다녀왔으니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하...아닌데..성향상 안 맞을 것 같은데....”

“좀 더 알아봐~ 나도 우리 부장님에게 얘기해 볼게.”


T와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동기, 후배, 선배들을 수소문했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내 코가 석자였다. 재밌게 일할 기회를 새로 들어온 팀원 때문에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 걔? 착해! 배려도 잘하고

- T가 거기 들어간 데? 거기 졸라 빡센데 아니냐? 고생하겠다 T 학교생활 엄청 열심히 해

- 뭐, 빠릿빠릿하진 않지만 진득하게 잘 가르쳐주면 괜찮을 거야~


생각보다 괜찮은 평가에 괜스레 민망해졌다.


‘내가 너무 편협한 시각을 가졌나.’


□□기관 부장님의 강력한 추천과 주변인들의 좋은 평, 그리고 팀원 없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E의 의견이 모여 새로운 신입 직원 T가 우리 팀으로 합류했다.



꼰대 빵


입사한 T와 따로 시간을 가졌다.

“T~~”

“네- 선임님.”

“나도 추천으로 들어온 거 알지?”

“네. 알죠!”

“여기 진짜 쉽지 않은 곳인 것도 알지?!”

“네 말 많이 들었습니다.”

“너 여기서 일 못하면 널 추천해 준 □□기관 부장님이 많이 곤란해지실 거야. 너 엄청 추천해주셨거든.”

“네.”

“그냥 면접 보고 들어오는 게 맘이 편할텐데...... 추천은 그렇지 않아- 내가 그랬으니까. 생각보다 더 힘들 거야. 그래도... 잘해보자!”

“넵!”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짜 꼰대 같은 대화인데 그때는 나름 진지했다. 더 이상 우리 학교 욕먹는 걸 보기 싫었고, 추천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T가 엄청 잘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발목만 안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게 J의 심경이었을까?



신입은 언제나 늘


T는 의욕이 넘쳤지만, 신입은 신입이었다. T 책상에 쌓여가는 이면지를 보니 신입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유쾌한 듯이 웃던 E는 T의 반복되는 실수에 점차 웃음이 사라졌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T는 ‘요상한 똥고집 부리기’+‘지시한 거 반대로 이해하기’ 등 대환장 콜라보를 시전하곤 했다. E는 답답함에 가슴만 쳐댔다. 항상 웃던 사람이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가자 직원들 모두 당황하기 시작했다. E는 T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데에 온 힘을 썼다. 나도 새로운 업무를 적응하고 알아가는 과정이었기에 T에게 업무를 알려줄 수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그 간단한 서류 하나를 몇 번을 봐줘야 해... 나는 내 일이 없냐고!! 걔만 봐주다 끝나. 빵도 제대로 못 봐주고 있는데! 하..진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E의 하소연이 귀를 찌른다. 나도 이제 선임인데 뭐라도 해야 할까. 괜한 책임감이 마음을 자꾸 찔렀다.


“서류 같은 거는 제가 먼저 보고 팀장님한테 넘기는 건 어때요? 결재까지는 아니여도....그게 좀 팀장님 스트레스가 덜하지 않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다. 부장이 반대했다. E가 팀장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는 이유였다. 아니 팀이 굴러가지 않는데 무슨 팀장의 무게야.......



분노의 E, 주눅의 T


T는 열심히 하려고 땀 뻘뻘 흘리며 뛰어다녔고,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지만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가... 열심히는 하는데.

J는 목소리라도 작고 조곤조곤했지, E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커서 온 기관에 쩌렁쩌렁 울려댔다. 그러다 보니 T의 동정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E가 너무 주눅 들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그럴 때마다 E는 억울해 미치려고 했다.


“T 데리고 일해봐! 내가 심한가! 안 심한가!”


E의 신경이 온통 T에게 가 있는 바람에 나는 알아서 내 역할을 해야만 했다. 새롭게 해야 할 일을 팀장과 논의하고 싶어도 시간이 나질 않았다. 팀 회의 시간에도 85%는 ‘T 혼나기 시간’, 10%는 ‘팀 내 사업 공유’, 5%는 ‘빵 미안해’였다.

T는 대답 하나만큼은 잘했으나 정말 대답만 잘했다. 또 업무나 회의, 운전 중에도 매일 매일 졸았다. 혹시 간이 안 좋은 게 아닐까 걱정하며 밀크시슬을 권하기도 했다. 지각도 일쑤였다. T가 혼나지 않기 위해 스리슬쩍 덮어둔 가벼운 거짓말이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굴러오기도 했다. 그냥 뭐 매 순간순간이 지뢰밭이었다. 수습하기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E의 머리에선 흰머리가 무럭무럭 자라났고, 원숭이띠인 나는 E 팀장 새치를 열심히 뽑다가 정수리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 것 같아 나중에 포기해 버렸다.


‘내 말대로 그냥 둘이 하자니까......’


T를 추천한 □□기관의 부장은 E를 만날 때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E는 T에게 화를 많이 냈기에 나도 T를 나무라기는 마음이 좀 그랬다. 그저 잘 타이르고 격려할 뿐.

E가 화가 많이 나면, 말이 엄청나게 빨라지고 지시도 두루뭉술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옆에서 잘 듣다가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기도 했다.


“선임님- 저는 언제쯤- 잘할 수 있을까요?”


T는 입을 꼭 다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답답도 답답한데, 짠하기도 엄청 짠했다. 일머리가 없는 걸 누굴 탓할까 싶기도 하고.


“나도 사고 엄청 쳤어- 행사도 말아먹고, 손님 있는 데서도 호되게 혼날 정도로 엄청나게...하라는대로 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해하지 못하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 이해하고 움직여야 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E의 구멍 메꾸기


T라는 지뢰밭에서 E는 경이로울 정도로 지뢰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며 구멍들을 메꿔나갔다. E의 에너지가 그렇게 쓰이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신입 때 나를 바라보던 선임 D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혼자 애쓰는 E가 안타까웠고, 혹여나 내가 짐이 될까 걱정하며 논의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묻어두었다.



안 졸았습니다


E가 준비한 직원교육 시간이었다. 존경할 만한 타 기관의 관장님을 강사로 초빙했다. E는 T를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졸면 죽는다. 졸리면 조용히 세수하고 다시 들어와야 해.”

“아 팀장님 저 안 졸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덩치도 엄청나게 컸던 T는 제일 맨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E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왔다. E는 T 바로 뒤에 앉아 등을 꾹꾹 찌르기 시작했다.


“....졸지마.”

“안 졸았습니다.”


누가 봐도 고개가 떨어지고 있는데 안 졸았다고 하는 T. 고개를 흔들며 잠을 쫓았지만, 잠이라는 게 뭐 그렇게 쉬이 쫓겨날 것이 아니었다.


“세수하고 와.”

“괜찮습니다!............zzzz”


졸리면 세수하고 오면 그만인데 똥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결국 열심히 교육을 진행하던 관장님이 한소리를 하셔야 했다.


“제가 강의를 열심히 준비 안 했나 봐요. 재미 없죠? 이렇게 앞에서 꾸벅꾸벅 졸 정도면-”


그때 내가 터져버렸다.


‘저 새끼가....돌았나....’


직원교육이 끝나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사무실로 들어갔다. E를 불렀다. E가 T를 먼저 혼내기 전에 가로채야 했다.


“팀장님- T 제가 데려가서 얘기할게요.”

화가 잔뜩 나서 굳어버린 내 표정을 보고 E는 놀래서 끄덕거렸다.


“T, 너 따라 나와”

“넵.”



열심히 했던 이유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첫 실습 때, 나를 응원해 주겠다고 기관에 방문하신 교수님은 실습 담당자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우리 학교 졸업생이 안 좋게 그 기관을 퇴사했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배 때문에 응원은커녕 ‘○○학교 출신은 별로야’라는 오명을 썼다. 학교에 대한 애정이 많은 건 아니었다. 뭐 대단한 학교라고. 그저 누군가의 무책임한 행동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나의 작은 행동 또한 누군가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구나를 알았을 뿐이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 보는 것이 싫었다. 그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후배더라도. 그래서 직장도 기를 쓰고 다녔다. 일개 실습생이었던 나를 좋게 봐준 부장과 관장의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터진 빵


T가 그동안 일을 못 하는 건 상관없었다.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노력은 하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졸았는데 안 졸았다고 변명하는 모습. 잠을 쫓으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모습에 실망했고 화가났다.

T는 □□부장의 추천으로 입사했다. 그렇지만 □□부장의 기대를 저버리고 결국엔 그를 고개 숙이게 했다. 그걸 넘어서 우리 기관 이미지까지 먹칠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도 정말 많이 났다.


“졸았어 안 졸았어?”

“....졸았습니다.”

“누가 봐도 졸고 있었는데 왜 안 졸았다고 하는거야?”

“........”

“너 입사할 때 내가 너 추천해 준 부장님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말라고 했지?”

“네”

“그 부장님이 E 팀장님 볼 때마다 사과하는 건 아니?”

“.....네”

“거기다가 너는 오늘 우리 기관까지 욕보인거야. 우길 걸 우겨야지.”

“죄송합니다.”

“여기저기 먹칠하고 다닐 거면 관둬.”

“아닙니다.”

“난 분명히 추천 입사가 더 어렵다고 말했어, 너 자리는 누군가에게는 엄청 간절한 자리야. 머리 쥐어 짜내서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해서 어렵게 들어오는 자리라고- 쉽게 들어와서 쉽게 일하는 거면 필요 없어. 때려쳐!”

“죄송합니다.”

“나한테 뭐가 죄송해? 오늘 직원교육 준비한 팀장님한테 죄송해야지. 가서 팀장님한테 죄송하다고 해.”

“네 죄송합니다.”

"먼저 들어가."


T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나는 한참을 휴게실에 앉아있었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후련하면서도 후련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곱씹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상처는 받았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격려해 주던 선임이 처음으로 정색하고 화를 냈으니 알아듣긴 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참 꼰대였다.)



퇴사 결심


그 무렵 나는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내 직업 외에 나를 소개할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다. 중심이 흔들리니 사업도 흔들렸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고, E를 불러 퇴사 이야기를 꺼냈다.

E는 생각보다 담담했고 곧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같은 팀이 되었는데 전혀 신경 써주지 못해서, 그래서 퇴사 생각이 든 것 같다며 자책했다. 퇴사 이유는 E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브레이크를 한번 밟고 싶었을 뿐이었다. E에게 괜한 죄책감을 지어준 것 같아 미안했다.


”너 말 들을걸 그랬다. 이게 뭐냐- 우리 둘이 일하면 진짜 재밌을 줄 알았는데.“


씁쓸함이 밀려온 듯한 얼굴이었다. 아쉬운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내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상태에서 마음도, 업무 스타일도 딱 맞는 팀장과 드디어 만났는데.



미뤄진 퇴사


공교롭게도 퇴사 이야기를 하고 이후, E는 발가락이 부러져 깁스를 했다. 항간에는 내 퇴사를 막기 위해 온몸을 굴러 넘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퇴사 의사를 밝히러 부장을 찾아뵈었다. 전에도 퇴사 생각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항상 잘 생각해 보라고 타일렀던 부장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 눈에서 확고함이 보였는지 바로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퇴사 이후 뚜렷한 계획이 없다면 2개월 정도 더 업무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곧 기관 창립기념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고, 그 행사는 우리 팀 주관이었다. 목발 신세가 된 E가 T와 갓 신입을 데리고 행사를 준비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부장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마무리하고 나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를 2개월 정도 미루기로 했다.



퇴사는 언제


기관 창립 행사 마무리 이후 약속한 퇴사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부장에게 불려 갔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지. 3개월만 더 퇴사를 미뤄달란 부탁이었다. T때문이었다. 눈에 띄게 T가 좋아졌고(이건 부장의 착각) T가 조금 더 적응할 수 있게 도와달란 부탁이었다. 이번에도 잡히면 영영 퇴사를 못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T가 좋아질 리는 없었으니까.

곤란하고 어렵다는 티를 팍팍 내며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하고는 다음 날, 3개월 뒤에 퇴사하겠다고 했다. 딱히 퇴사 이후 계획이 없었고, 3개월이면 명절 보너스에 제주도 연수까지 갈 수 있으니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T의 배신


사업계획서 작성으로 바쁜 1월. T가 나를 따로 불렀다. T는 곤란할 때 짓는, 아니 사실 매일 같이 짓는 입을 꾹 닫고 입술 양 끝을 위로 올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임님 저 퇴사하게요.“


T가 입사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1년정도 해보니까... 전 이 업무랑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냥 그만두고 아버지 사업 도와주려구요.“


‘그래. 그랬지, 너는 아버지가 사업해서 학교에도 외제 차를 몰고 다니는 아이였지. 이렇게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두지 뭣 하러 여러 사람 힘들게 했을까? 난 너 때문에 내 퇴사도 미뤘는데...’


온갖 꼬인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퇴사가 5개월이나 밀렸다는 것. 그동안 E와 T 사이에서 가슴 졸이던 모든 순간. 너는 도망갈 구멍이 있어서 좋겠다는 열등감. 모든 감정이 뒤엉켰다.


“내가 너 때문에, 퇴사가 5개월이 밀린 건...아니...?”

“아 선임님 퇴사하려고 했어요!?”

“그래!! 너 좀 더 봐달라고 퇴사 미뤄달라 해서 미뤘다 이눔시끼야!”

“죄송해요.”

“휴...죄송하긴 뭘- 고생했다. 팀장님이랑 부장님한테 잘 말씀드려.”

“네- 안 맞는 일 계속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했네요.”

“일이 안 맞을 수도 있지 뭐. 노력해서 다 되면 얼마나 좋겠냐. 일도 사람도 안 맞으면 힘들지 뭐. 너도 고생했어.”


끝까지 좋은 선임으로 남고 싶었던 나는 새어 나오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대화를 마무리 했다.



T의 진짜 진짜 배신


E와 함께 야근 중이던 어느 날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온 E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T가 다른 기관 사람들에게 우리 욕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었다.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우리라니? 나까지 포함해서?’


T가 워낙 E에게 많이 혼난 터라, T가 E를 욕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까지? 나도? 나를 욕했다고? 그래도 나름 좋은 선임, 착한 선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욕할 일이 무엇이 있지?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꽤 자세한 말들이 나왔고, E는 화가 나긴 했지만 이미 퇴사할 T였기 때문에 욕하든지 말든지의 태도로 금방 화가 식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엄청난 배신감에 휩싸여갔다. 그렇게 혼날 때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도와줬는데 왜?

그땐 몰랐다. T에게는 나도 그냥 어줍잖은 상사였을 뿐이라는 걸. ‘나는 좋은 선임이겠지’라는 생각은 후임에게는 아무런 공감을 못 얻는다는 것을. ‘상사는 욕해야 제맛!’이라는 사실을 선임이 되자마자 까먹은 탓이었다.

배신감에 한 일주일간 T를 마주하지도 않고 깍듯하게 존댓말을 해가며 거리를 두었다. 보다 못한 E는 T를 불러 뒷담화한 사실을 들었다고 언질을 주었다.

T는 팔짝팔짝 뛰며 결코 아니라고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말이 전하면서 와전된 것이라고, E도 나도 욕한 적 없다고 했다. 그렇게 T는 나에게 와서 사과했다. 믿을 수 없지만, 믿어보기로 노력했다. 뭐 욕을 했든지 말든지 이젠 무슨 상관이며, 하면 또 어떤가라는 생각을 하려고 꽤 노력했다. T의 퇴사 파티. 속상함과 이런저런 마음이 뒤섞여 거하게 취해 버렸다.


“너-이쉐끼 나를 욕해!? 임마 이눔시끼! 미워 이 새끼약!! 너 땜에 퇴사도 미뤄지고!”

“아니예요~ 선임님 얼마나 고마웠는데요~ 제가 선임님을 왜 욕하겠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잘 지내세요!”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던. 그렇게 지뢰밭이었던 T가 떠나갔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 팀장이 되어 잘 해내고 싶었던 J가 나를 만나서 주춤했었고, 막 팀장이 된 E도 T를 만나 주춤했다.

이러한 경험 또한 그들이 팀장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없어도 좋을 경험들이다. 그렇다고 누구의 탓을 할 수 없이 우연에 우연을 더한 일들이었다.



나는 서운하다


T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E의 이야기로 마무리해야겠다.

T로 고생했던 E는 팀원들의 공백을 메꿀 준비를 했다. 나도 팀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인수인계도 꼼꼼하게 진행했다. 안녕을 고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E는 파워 E였다.(MBTI의 E) 술자리에 친구를 부르고 그 친구가 또 친구를 부르고, 불러온 친구가 또 친구를 부르고 불러서 어느덧 그 가게가 서로의 친구로 가득 차게 되는 경험까지 해봤다.

파워 I였던 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힘들었다. 특히 우리 팀 회식인데, 어느덧 다른 팀원이 낀다거나 다른 기관 사람까지 껴서 점차 커지는 판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회식 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퇴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하는 팀 회식. 설마 오늘도 사람을 부르려나 싶었다. 그러나 역시나 이미 와있는 다른 기관 사람들...

거기다 타 기관 사람들과 대화가 깊어지자, 사적인 이야기 좀 하게 잠시 어디 좀 다녀오라고 말하는 E였다.


‘아니 팀장님.....이거 제 송별회식이거등여...?’


서운함을 바로 말하지 못하는 파워 I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마음 속에 깊이 묻혀져있다 이제야 글로 박제한다.

팀장님 그때 너무 서운했어요. 췌!췌!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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