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간도 아니라면 어떨 것 같아 (하)
도쿄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하루는 동경역 근처의 시내 중심가에서 보내고, 다음날 늦은 아침에 후지사와역에서 에노덴을 타고 에노시마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정도 가는 길에 해안가가 보이자 우혁이는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우혁이는 서울에 있을 땐 마음이 항상 조급해 보이는데,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물에 붕붕 떠 있는 튜브 같은 사람이 된다. 일본에서 소도시를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애니메이션 속의 풍경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은 마치 생크림을 펴발라 놓은 듯 부드러웠고, 빛이 반사된 바다는 물결이 일어 투명하게 광채가 나고 있었다.
우혁이가 에노시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누운 모양으로 천천히 모래를 쓰다듬는 파도 때문이라면, 나는 아기자기한 형태의 에노덴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에노덴은 일본의 수동식 전철이다. 4량 밖에 되지 않는 그 전철은 자동차의 대열에 껴 운전수가 직접 운전을 하고, 바닥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에노시마. 그곳은 일본의 여행지라고 했지만 자연 풍경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가까운 도시는 요코하마가 있고, 요코하마라고 하는 것보단 도쿄에서 가깝다고 말하는 편이 이해하기가 쉽다. 에노시마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섬이다. 긴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에노시마의 가운데에는 어느 신사나 마찬가지로 소원을 이뤄주는 동상이나 건물이 몇 채 있을 뿐이었고, 사방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해안선의 끝에서부터 아마도 고기를 잡는 배와 수출용 선박이 물길을 가르고 있을 뿐이었다.
에노시마는 서핑을 하러 온 관광객이 주를 이룬다. 에노시마에선 해산물이 주 요리이다. 에노시마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은 문어전병과 잔멸치 요리. 이곳에서는 무려 잔멸치를 아이스크림 토핑으로 올려 먹고 있었다. 그날이었던가. 우혁이와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날이.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편인 내가 잔멸치에 관심을 보이니 우혁이가 야만적이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나는 괜시리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은 것 같아 투덜거리며 우혁에게 말했다. 그러자 우혁이 미안하다 말하면서 슬슬 상점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날따라 어쩐지 나는 우혁이가 해산물을 잘 먹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혁이 말로는 어릴 때 생선 눈알을 봐서라는데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옆에서 코를 막고 있는 우혁이를 흘깃 바라보고는 잔멸치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문했다. 잔멸치 가게에서는 잔멸치로 만든 어포와 아이스크림 위에 잔멸치 토핑을 그대로 뿌린 아이스크림, 그리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잔멸치회가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주문한 건 상점가의 대부분이 잔멸치 토핑이 있었던데다 대표상품인 것 같아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가격은 500엔 정도. 한 입 먹어보는데 웬걸, 부드러운 우유 크림과 짭쪼롬한 잔멸치가 제법 맛이 조화로웠다. 감자칩에 사워크림을 찍어 먹는 맛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우혁에게 아이스크림을 척하고 내밀었다. 우혁이가 평소 감자칩과 사워크림 조합을 좋아하기에 맛있는 걸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애의 턱끝까지 아이스크림을 치켜 들자 우혁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먹어 봐.”
“싫다니까. 나 해물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거 조금도 못 먹어? 진짜 맛있어서 그래.”
“싫다고. 나는 싫어한다고.”
“야,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맛은 봐라. 내 성의를 봐서라도.”
“네 성의가 왜 이런 것에 쓰이는데? 나는 정말로 물고기 못 먹는다고.”
그날은 우혁이가 처음으로 내게 크게 화를 냈다. 우혁이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얼굴까지 벌개진 채로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날은 숙소로 돌아와 우혁이도 나도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첫날이었거나 둘째날이었다면 정말 최악의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우혁에게 물고기를 먹어보라는 둥, 사케동이 먹고 싶다는 둥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우혁을 만나는 날엔 해물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우혁이와 내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음식을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혁이는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첫 여행에서는 서로를 맞추느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면 그와 반년쯤 만났을 때에는 각자 음식을 먹고 오기도 했다. 우혁이는 후각이 발달해서 내가 밖에서 회를 먹고 온 날이면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그날은 우혁과 잠도 따로 자야 했다. 우혁이는 내게서 물고기 썩는 냄새가 난다며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에 우혁이로부터 특별히 사랑을 더 느낄 때도 여행지에서였다. 식습관 하나는 곧 죽어도 맞지 않았지만 우혁이는 언제나 내가 있는 곳을 향해 헤엄쳐 온다. 내가 길을 걷다 가야 하는 곳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지도를 보지 않아도 우혁이는 직감으로 척척 다닐 줄 안다.(나중에서야 우혁이가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지만) 내가 옆에서 조금만 한숨을 쉬어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온다. 우혁이와 함께 파도를 타다 모래에 살이 쓸릴 때면 자신의 보드에서 금세 내려와 나를 살핀다. 그밖에도 내가 우혁에게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우혁이는 내 눈빛만 보고도 나를 잘 아는 사람 같다. 내가 아쿠아리움에서 좋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데리러 온 우혁은 그날만큼은 누구보다 내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우혁은 서른인 나와 동갑인데 나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한다. 우혁의 웃음엔 대체로 여유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우혁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우혁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웃음. 그런 웃음을 인지하기 시작한 건 우리가 세 번째로 만나던 때였다.
우혁은 내게 처음 밥을 사주었던 날 이후로도 종종 나와 저녁을 먹고 가곤 했다. 우혁은 아무 이유없이 아쿠아리움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료를 공급하러 왔다가 전시실 하나를 보고 가는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연락처도 교환하고, 종종 연락도 주고받고, 또 연락을 하며 관계를 계속 이어갔다.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이야기는 어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휴일에는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혹시 요즘 유행하는 챌린지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지. 그러다 문득문득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지다보면 남들은 잘 하지 않는 질문도 하기 마련이다. 아쿠아리움의 사정을 묻던 우혁에게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아쿠아리움에서 일어나는 경영난과 그로 인해 내 올해 연봉이 동결되어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뿐 아니라 관리자급의 사소한 실수로 얼마 전 물고기가 집단 폐사해 처리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부터 물고기에게 돌아가야할 자본이 애먼 사람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혁이는 또 화를 냈고, 짜증을 냈고, 나와 같이 나쁜 사람들을 욕하기도 했다. 또 그러다 엉뚱한 질문도 하는 것이다. 우혁이는 내게 좋아하는 물고기가 있느냐고 물었고, 수족관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물고기가 없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뭐가 웃긴지 소리를 낮추어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물고기를 잘 돌봐주어서 고마웠다고, 그래서 밥을 사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혁이는 그날 내게 핸드크림도 선물해주고, 영양제도 선물해주었다. 그저 고맙다고, 물고기를 잘 돌봐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으나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 나한테 관심이 있나?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혁이는 나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우혁의 말로는 내가 귀엽게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귀엽게 생기지도 않았고, 예쁜 편도 아니다. 맡은 바 성실히 책임을 다하는, 수족관의 직원이었을 뿐이다. 아마도 우혁이가 내게 가졌던 것은, 실은 나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자신과 다른 세계를 살아온 타인에 대한 정량의 호기심과 나름대로 재능이라 생각하는 개그욕심. 그리고 어쩌면 내가 우혁의 외적인 이상형이었을 수도 있을 거다. 내가 우혁이 내게 보여줬던 행동에 혼란을 느끼고 오해를 했던 것처럼, 우혁 역시 나를 이상화하거나 좋은 사람이라고 오해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게 우리는 쓸데없는 용기를 서로간에 내다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것이다.
그 물고기가 우혁이네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느니, 관심이 있다느니 하는 그런 사소한 오해 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 애를 한 번 더, 한 번 더 알아가보겠다는 쓸데없는 용기 따윈 내지 않았을 텐데. 가끔 그 애가 보편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유난히 예민한 환경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던 것은 나 역시 너무 현실을 이상화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물고기가 조상인 인어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선택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 애를 만났을까.
요즘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있잖아, 실은 너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언젠가는 해야 하는 얘기인데. 그건 다음에...”
나는 운전석에 앉은 우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짜증이 났다. 언제고 우혁이가 수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 비밀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왠지 그걸 아는 순간 우리 사이에 크게 금이 갈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들었다. 게다가 하필, 우리가 결혼을 하기로 이야기를 한 상황에서 우혁이가 내게 털어놓아야 하는 최후의 비밀이 무엇일까.
우혁이는 언제나 내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듯 조심스러워 보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우혁이와 전화를 할 때면 우혁이는 언제나 내게 조심조심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니까 무언가 말을 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꺼내지 않는 듯한 느낌. 말을 하다가 자주 멈추는 것이 그 애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가 그 애의 탄생 자체를 축복하면서 그 애의 속내를 조금 열어볼 수 있게된 것이다.
“뭔데? 지금 얘기해.”
우혁이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우혁이가 언젠가 내게 말해야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은 나한테 진짜 친한 친구 한 명만 알고 있는데. 친구는 사실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처음에 시작할 땐 이렇게 진지해질 줄 몰랐거든....”
“그러니까 그게 뭔데?”
우혁이가 내게 이렇게 비장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덩달아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우혁이의 전부를 알 수 없듯 우혁 역시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지 못하지 않는가. 우혁이를 만나면서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우혁이 내게 털어놓을 일련의 비밀들은 언제나 내게 예민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혁이를 알면 알수록 우혁이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 좋았으므로, 웬만한 모든 것들은 다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혁이가 어느 날 잘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고, 우혁이가 팔 한 쪽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우혁은 그냥 우혁이니까. 우혁이여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혁은 내게 언제나 숨기는 것이 없었고, 되려 내가 덜렁대며 우혁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혁이가, 내게. 지금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우혁이는 이렇게 비좁고 정신없는 차 안이 아닌, 조금 여유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길 원했으나 불안한 마음에 우혁이에게 얼른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친 쪽은 나였다. 우혁이는 내 눈치를 스윽 살피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실은. 이건 내가 선택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야.”
“뭐가?”
우혁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실은... 나.... 인어야.”
“뭐?”
처음엔 거짓말 같아서 피식하고 웃음이 났고, 평소 우혁이가 내게 실없는 농담을 자주 해내거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잘 하지 않는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내게 또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혁이의 그런 면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우혁이가 웃고 있지 않다. 우혁이는 보통 농담을 할 때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그런데 긴장된 얼굴. 코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 우혁이의 옆모습이 해가 지는 창가의 불빛에 비쳐 반쯤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나는 한참을 웃다 웃음을 멈췄다. 너무 진지해서 더 웃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마음 한 구석이 쿵 하고 내려 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만... 너... 그거 진짜야?”
“이거 농담 아니야. 나중에 너 놀랄까봐 내가 평소에 장난을 많이 치긴 했는데. 이건 진짜야.”
우혁이의 콧잔등에 땀이 조금 맺혀 있었다. 차 안은 금세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우혁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다 우혁이를 바라보았다. 너 내가 아무리 장난을 재밌게 받아줘도 이런 걸로 사람 우습게 만들면 안돼. 나는 그때까지도 우혁이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인어가 어디있어. 네가 전지현이야? 아니, 인어면 어떻게 이렇게 인간과 똑같이 생길 수 있어. 내가 생각한 인어는 적어도 비늘 몇 알 정도는 떨어져 줘야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혁이가 한숨을 쉬었다.
“뭐? 야... 무슨 장난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웃기지 마.”
“미안. 나는 근데 내가 줄곧 인간이라고 생각해와서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길 원해. 내가 인어라고 해서 뭐 특별하게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그런 사명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나는 지금 네가 좋고. 너랑 이렇게 지내는 게 좋고. 그런데 그래도 너한테는 알려야할 것 같아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야, 이 새끼야. 너 사람 아니라며.”
“그러니까! 내가 어떤 종족인지.”
우혁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아마 우혁이가 이런 결심을 하게된 것은 얼마 전 내가 결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 곧 결혼하는 친구가 있는데, 너무 부럽더라. 너는 결혼 생각이 있냐. 가족은 어떻게 구성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우혁이는 내 물음에 띄엄띄엄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을 했다. 회사도 잘 다니고 있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우혁이가 가끔 내가 평범한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때는 우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렴풋이 퍼즐이 맞춰지는 것들이 생겨났다.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우혁이는 이미 가족과 만나기로 한 시각이 임박했는지 조금 초조해 보였다. 지하철역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 진실을 알지 않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 애의 탄생 자체를 축복하지 않았다면 그 애가 내게 진실을 털어놓는 것을 조금 더 미루지 않았을까. 무엇이 실수였을까.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한 바퀴만 더 돌까?”
우혁이는 슬쩍 사이드미러를 보더니 잠시 주유소에 들려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우혁이는 인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그 이후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우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우혁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알아들을 수 없었을 뿐더러 ‘인어’라는 선택지는 내가 생각했던 변수에도 없었던 거니까.
우혁이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차에서 내렸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졸음이 조금씩 몰려왔다. 내 앞으로 펼쳐진 풍경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해가 조금씩 기울어지는 백색의 하늘. 어둡게 붉어지고 있는 햇빛. 조금 더 거세진 바람결. 그 순간 화장실을 향해 반쯤 가던 우혁이가 몸을 돌려 다시 차로 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휴대폰을 스윽 꺼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뭘 숨길 게 또 있다고?
그러고보니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우혁의 휴대폰엔 쉽사리 DM이 오는지 알람이 울렸고, 우혁과 만나는 동안 평소 그 애는 사람을 좋아해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 그 중에는 여자애들도 많아 보였고, 우혁이는 친하게 지내는 여사친들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걔는 모르겠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말하면 내가 별로인 여자애로 보일까 봐 실은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다하다 뭐? 인어라고?
허, 하고 웃음이 나왔다. 우혁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 자동차 앞좌석을 발로 뻥 찼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 인생 뭐 이렇게 되는 게 없나 싶었다. 우혁이가 내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껏 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옆에서 똑똑 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우혁이가 서 있었다.
“잠깐 내릴래?”
우혁이 자동차의 주유구를 뽑으며 물었고, 나는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우혁에게 폭 안겼다. 팔을 펼쳐 우혁의 몸을 안으면 그 애의 도드라진 등뼈가 고스란히 만져진다. 우혁에게서만 나는 특유의 강아지 발바닥 같은 냄새도. 우혁에게선 언제나 시멘트를 갓 굳힌 듯한 냄새가 난다. 잠깐, 이것도 인어들에게서만 나는 냄새인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나는 까치발을 든 채 우혁의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우혁이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주유구를 조심스레 제 자리에 내려놓고는 남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우혁 역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일단은... 안 들은 걸로 할래. 물러.”
“시대야, 미안한데 이런 건 못 물러.”
지극히 이성적인 우혁의 말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한숨을 쉬었다. 더 말하지 마. 그냥 조용히 이러고 좀 있자. 내 말에 우혁이 알겠다는 듯 어깨 위로 끄덕이는 고개가 느껴졌다. 우혁의 몸을 안고 있으면 꼭 거대한 전기장판을 두른 것 같다. 우혁의 가까이에만 가도 따뜻한 열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 근처에 내리기 전, 우혁에게 물으니 실은 그것도 자신이 인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어는 인간보다 기초대사량이 더 높다나 뭐라나. 이 사실을 계속해서 숨겨올 수 있었던 건, 지구에 살고 있는 인어 집단이 철저하게 서류를 바꿔치기해주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자신이 인어라는 특수한 사실 때문이지, 실은 교포나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마법사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우혁은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 빵집에 들러 커피와 쿠키를 주문해 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도저히 가족이 있는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밤이라고 생각했다. 내내 우혁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