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햇수로 3년에 걸쳐 쓰여졌다.
그리고 쓰는 동안 이하이의 <구원자>를 자주 꺼내 들었다.
스토리도, 배경도, 인물 설정도 그 사이 다섯 번 정도 바뀌었던 것 같다. '시대'라는 인물을 세상에 이해받게 하고 싶었던 것이 목적이었으나, 소설을 합평받을 때마다 시대만 거세게 비난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때 나는 시대만이 옳고, 시대를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이 많이 서럽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시대는 지금 이 소설에 쓰였던 시대와는 또 결이 많이 다를 것이다.
지금 버전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시대'와 '우혁'의 캐릭터가 나오기까지 많은 연애 프로그램과 책을 읽어야만 했다. 고백하자면 지금 버전의 소설이 탈고될 때까지 결혼은 커녕, 연애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쓰던 당시에 가장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생각은 왜 내 연애만 쉽지 않을까? 하는 의문과 '나'라는 사람에 대한 탐구였다. '사랑'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개념 같았는데 왜 내게만 복잡하고, 서로간에 따져보거나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많을까. 그것이 그 당시의 내가 사람들을 스쳐지나보내며 내린 결론이었다. 마음은 지치는데 답은 나오지 않아 답답하고, 친구들이 말하는 그 좋아하는 몽글몽글 마음이란 건 도무지 생겨나질 않고, 피곤하기도 하고, 남들은 쉽게 하는 걸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싫었던 순간도 많았다.
아마 다시 이 소설을 쓴다면, 가장 먼저 퇴고하게 될 것은 '시대'가 '우혁'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많이 생각하고 넣게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시대가 파혼을 결심했던 그 이유는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나의 재량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할 때면 속으로 되뇌이고 자신감을 되찾는 나만의 응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나는 엉뚱하지만 늘 해결책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시대에게'는 결혼을 어렵게 만드는 이 시대를 비난하고 싶어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는 특히나 청년세대에 마냥 관대하게 두 팔을 벌리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주거, 이동, 그리고 직업적인 측면으로 한국사회를, 그리고 서울을 바라보려 했는데 지금의 나는 '시대'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시대는 세상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았던 인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시대에 '결혼'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통과의례이기도 했고, 필요에 의해 선택했다면, 지금 세대의 결혼은 (적어도 나에게는) '욕구'에 의해 선택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본래 인간은 독립적으로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적절한 정도의 교양과, 가끔 즐기는 휴가, 그리고 쉶을 알게 해주는 운동과 가벼운 취미 정도면 인생을 살아가는 건 퍽 충분하고 만족스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을 만드는 데에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라는 사람이 스스로 나를 가꾸고 일궈내어야 하는 생의 의미이자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저히 풀리지 않는, 통제되지 않는 욕구가 일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는 것 아닌가. 계속계속 얼굴을 마주하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고 싶고, 먹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이 언젠가는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건 비효율적이라도 욕구의 문제이므로 이성이 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주변은 보이지 않고 오직 세상에 하나뿐인 한 사람만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경험. 그런 욕구의 끝이 가늠되지 않을 때 결혼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게 '결혼'이라는 의식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결혼보다 중요한 건 '사랑에 대한 믿음'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인정한다.
그리고, 장편으로 연재되었던 <사랑하는 시대에게>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