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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로 Aug 30. 2022

현실아, 네 말이 다 맞아

나의 창의적인 실패기 3





용량 부족에 시달리던 뇌는 일 년 동안 배운 경매 지식을 부지런히 포맷했다. ‘경매는 어렵다’라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정보만 남았다. 내 팔자에 돈은 무슨 돈이야. 돌고 돌아 다시 순수문학 강좌를 등록했다. 




선생님은 ‘돌아온 탕자’에게 궁둥이를 붙이고 꾸준히 글을 쓰기를 권했다. 심화반 강의는 조금 더 심오해졌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소설들도 공부했다. 깊이 있는 사유와 철학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어려웠다. 내 무식이 드러날까 위축되었다. 선생님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종종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작가는 시를 안 써서 몸이 아팠대요. 그런 감정, 뭔지 알죠?”


“글을 쓰면 누가 돈을 줘? 아니, 그냥 쓰는 거야.”


“자기표현 욕구는 누구나 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글을 써서 드러내죠.”




선생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강생들이 낯설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 같았다. 예술에 미친 사람들. 나는 어딘가에 미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글을 쓴다며 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업을 들을수록 과연 내가 작가의 자질이 있는지 자꾸 되묻게 되었다. 




순수 문학도는 투잡의 달인이어야 했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쓰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밤늦게 퇴근하고서도 뻘건 눈으로 글을 쓰는, 글에 온 몸을 불사르는 예술가였다. 나는 그런 예술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미치는 것도 체력이 되어야 하지, 체력도 안 되는데 미치면 예술이 아니라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역시 나는 현실적이었다.     




글은 쓰고 싶은데 돈도 벌고 싶다는 욕구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사춘기 시절, 소설보다 만화책을 좋아했다. 전공 선택에서도 돈이 안 되는 순수미술 대신 디자인을 선택했다. OTT나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도 책보다는 미국 드라마를 PMP(휴대용 영상 재생 기기)에 저장해 어디든 들고 다녔다. 이후 넷플릭스와 웹툰의 상륙으로 나의 여가생활은 풍요로워졌다. 뒤통수가 갑자기 시원해졌다. 내가 갈 길은 상업 예술, 상업 콘텐츠였다. 거대 자본이 모이는 시나리오나 드라마가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예술성도 필요하지만 일단 자본이 모이는 곳이니 돈, 돈, 돈을 외치는 내게 제격이었다.           









시나리오 강사분은 돈, 돈, 돈 하셨다. 꿈을 크게 가지세요. 유명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 유명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 회당 1억씩도 벌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되겠다! 꿈을 크게 가지라 독려한 뒤에 그는, 작가라면 대중이 원하는 걸 써야 한다고 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에 돈이 모인다고. 




시나리오에는 뚜렷하고 정형화된 뼈대가 있었다. 그 뼈대에 맞추어 내 상상을 욱여넣어야 했다. 주인공은 결핍을 지녀야 하고, 처음에는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지만, 결국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이다. 시나리오가 괜히 돈을 버는 게 아니었다. 강도나 사기꾼이 거액의 은행이나 고액자산가를 털려면 치밀한 계획 아래에서 움직여야 하듯이 영상용 글쓰기는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집요하고 계획적이어야 했다. 




강사님 성향 역시 매서웠다. 작가는 비판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지망생들은 앞으로 수많은 감독과 PD, 공모전에 무참히 거절을 당할 운명이며 만약 계약되거나 당선이 된다고 해도 수없이 많은 수정을 거친단다. 대한민국 최고의 장르 대가 김은희 작가님도 첫 시나리오는 혹평을 받았다니, 나 같은 일개 망생이에게 비판과 혹평은 숨을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하게 다졌다.




돈과 글이 공존할 수 있는 이 길이 내 길이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살림도 뒤로하고 식사도 거르면서 글을 썼다. 간혹 남편과 함께 식사할 때도 뇌는 작동을 멈추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한 채 플롯을 이리저리 바꿔 끼는 데 집중하느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남편과 대화도 하는 듯 마는 듯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밤을 새웠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김이 풀풀 날 정도로 과열된 머리를 베개에 뉘었다.




평범한 인간이 그렇듯, 굳게 먹은 마음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많은 수강생 앞에서 30여 분간 이어진 강사님의 꼼꼼하고 치밀한 혹평은 내 자존감을 떡 반죽처럼 마구 치댔다. 재능이 없다는 말을 30분간 다양한 표현으로 들은 기분이었다. 작가를 꿈꾸던 영혼이 내 머리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역시 돈이 모이는 곳은 정글이구나. 흠씬 두들겨 맞고 정글에서 빠져나왔다. 일주일을 울었다. 한 달 동안 무기력에 빠졌다.




무슨 작가가 될지, 그리고 작가가 될 수는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삼 년간의 여정 끝에, 내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건, ‘역시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는 ‘확실한 절망’이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2021년 연말은 어둡고 고요했다. 작가는 아무나 되냐며 잔소리하던 ‘현실’이가 생각났다.




현실아, 네 말이 다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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