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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형 Apr 14. 2024

생존이 아닌 공존

살아남기가 아닌 함께 살아가기.

5. 생존이 아닌 공존


지금은 초경쟁 사회

 우리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여럿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사회 안에서는 계급이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도 존재한다. 

계급보다는 역할이라는 단어를 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런 계급, 역할의 존재는 우리를 쉽게 경쟁하게 만든다. 

좋은 경쟁이 있는 반면에 좋지 않은 경쟁도 많다. 작가는 경쟁은 딱히 좋은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사회에는 나뿐만 아니라 타인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비교'를 참 쉽게 하곤 한다. 

사회에서 나와 남을 분리하고 비교하며 조금씩 거리를 둔다. 

외모, 성격, 태도, 재산, 능력 등 모든 분야에서 분야는 이루어진다. 그렇게 비교된 것들은 우열이 갈린다.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으며 누구는 잘생겼고 누구는 못생겼다. 

누구는 돈이 많고 누구는 돈이 없으며 누구는 성격이 좋고 누구는 성격이 좋지 않다. 

누구는 일을 잘하고 누구는 일을 못하며 누가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누가 더 적게 가졌다. 

이런 비교는 우리를 잡아먹는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비교에게 잡아먹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를 조금씩 짓누른다. 


 결국 비교의 결과는 경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남보다 좋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며 더 높이 올라가려 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 경쟁이 너무나 심화된 '초경쟁 사회'가 되었다. 

학교와 회사,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경쟁은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존, 살아 있음 또는 살아남음.

 첫 번째 방법은 '생존'이다. 경쟁 사회에서 많은 사람,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은 생존하려 한다. 

경쟁이라는 정글 속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한다. 남들을 다 제치고 혼자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들에게 진정한 동료는 없다. 모두가 경쟁자이며 밟고 올라가야 할 장애물들일뿐이다. 

콜로세움에 들어온 검투사들처럼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위로 높이높이 올라가기만을 바란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에게 상처 주는 일쯤은 그들에게 식은 죽 먹기이다. 

가끔은 없으면서도 있다고 하며 있으면서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치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물고 뜯는다. 

어떨 때는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게 아니라 상대가 힘을 못쓰게 하는 비열한 짓까지도 한다.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것을 지킨다. 글로만 적어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알 수 있다. 


 경쟁에 뒤처진 사람들은 점점 소외되고 고립된다. 

그들은 모멸감을 느끼며 사회를 두려워하게 되고 더 낮은 곳이 없을 만큼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중간층은 점점 사라지고 위와 아래로 사회가 극명하게 나뉘게 된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생존의 대가는 엄청나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원하던 것을 갖고 보니 가진 것에 의미가 사라진다. 

내가 올라온 위치를 알고 내려다봤을 때 그들은 공포를 느끼며 누군가 잡아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때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다. 결국 그들은 높게 올라갔음에도 추락한다. 

이 추락에 끝은 없다. 가장 높이 올라갔었지만 누구보다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물론 모든 사회와 사람이 이렇다며 일반화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공존,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

 두 번째 방법은 '공존'이다. 사실 요즘 시대에 공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낭만주의자라 말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공존하려 했지만 결국 생존하기를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는 나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제일 작은 사회마저도 너와 나로 이루어져 있다. 

한 마디로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경쟁사회라고 해도 사회는 사회이니 이 논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경쟁자로만 본다면 그저 넘어서야 할 하나의 장애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그들도 곁에 있는 하나의 사람일 뿐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생존과 공존이 아예 다른 것은 아니다. 

생존하는 사람도 공존할 때가 있고 공존하는 사람도 생존하기 위해 애쓸 때가 있으니.


 '공존'의 첫 단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걸 인식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자신의 것이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나만큼 상대를 봐주는 것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면 내 옆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 

생존하던 사람이라면 멈춰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이제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신에게 있다. 

아무리 남을 생각한다고 말해도 결국 자신의 관점에서인 경우가 허다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시선으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이해해 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에 공감은 안될 수 있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공감과 이해는 다르기에. 


 '공존'의 마지막 단계는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혼자 살아내기엔 너무 각박한 세상 속에서 함께하는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처럼.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 인류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고립되는 사람을 이끌어주고 먼저 앞서갔다면 기다려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라도 함께 나아간다.


생존이 아니라 공존

 생존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공존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존을 배워간다면 삶이 달라진다. 

혼자 짊어지려 했던 짐을 나눌 수 있고 혼자 견디려던 것들을 털어놓을 곳이 생긴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게 된다. 결국 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삶을 꾸려가기도 바쁜 와중에 살아남기 위래 노력해야 한다니 얼마나 비참한가. 

현 사회는 어린아이들부터 성인들까지 모두가 생존하며 살도록 요구한다. 

뭔가를 성취하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는. 

 

 하지만 사회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터가 아니라 공존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만든 보금자리이다. 그렇기에 어떤 일을 하던 어떤 위치에 있던 어떤 생각을 하던 우리는 생존이 아닌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공존한다면 타인이 잘되는 것을 시기 질투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할 줄 알고 남을 배려하고 도울 줄 알며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항상 긴장하지 않아도 되며 마음 놓고 잠에 들 수도 있다. 

남과의 불필요한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경쟁하며 스스로 발전할 길도 열리고 경쟁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불화도 줄어들 것이다. 


 내가 공존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하는 마음이라면 일단 공존해 보길. 

남이 바뀌지 않아도 내가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이 뭐라 하던 내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기에. 공존이 유지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잠깐이라도 공존한 시간 속에서 얻는 중요한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공존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면 좀 더 따뜻하고 편안한 세상이, 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생존할지 공존할지는 독자들의 선택이다. 작가의 의견을 강요하려는 의도는 일절 없다. 

다만 부탁하고 싶은 건 공존과 생존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랄 뿐이다. 

자신이 그동안 어떤 것을 택해왔는지, 앞으로 어떤 것을 택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이다. 


작가의 말

 삶은 생존의 연속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슬프다. 꿈과 희망이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 생존과 성취,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 우리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처음 연기 입시를 할 때도 생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들보다 모든 측면에서 뛰어나려 부단히 노력했고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노력으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뒤처진다고 내 노력들이 부정당하지도 않았다. 

그걸 느낀 후 공존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하는 건 알려주고 못하는 부분은 배워가며 함께 나아갔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대학이 나뉘었고 성적이 갈렸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한 사회에 속해 살고 있었다. 

그 사회에서 생존하려던 친구들은 먼저 달려가다가 힘이 빠져 쓰러졌다. 

하지만 공존해 나가려던 친구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뒤처진 사람 없이 함께 뛰어나갔다.

 

 그 해 우리 반은 좋은 입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구성원들이 각자가 특출 나서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끈끈하게 뭉쳤고 그 시너지가 우리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각자의 매력 속에 다른 사람의 매력들이 조금씩 더해져 다양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좋은 성과가 있으면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나쁜 성과가 있으면 함께 슬퍼해줬다. 

나는 떨어졌는데 남은 붙었다고 해서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만나 뵌 오만석 교수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이제부터는 생존이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가 아닌 남을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배우가 되어라.'


 이 두 문장은 내 머릿속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특히 '내가 아닌 남을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배우'라는 말은 어느새 내 목표가 되었다. 

연기판은 하나의 사회다. 그리고 경쟁이 즐비한다. 오디션장에서 현장에서. 

하지만 그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배우는 누구보다 좋은 배우가 될 것이라 믿는다. 

생존하려는 배우가 뜰 수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공존하는 배우는 늦게 뜨더라도 오래갈 수 있다.


 연기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이 논리는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독자는 잠깐의 성공을 원하는가, 아니면 오래갈 수 있는 힘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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