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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가치 그게 보이는 거던가요? 보이는 물질의 세계로 오세요” 수 십 번의 이별에 지친 여주가 전 남자 친구에게 쏟아붓던 에너지를 어딘가로 돌려야 할 때, 가방이 말을 건다. 보이지도 않는 믿기 힘든 사랑 대신 감각의 세계로 건너와 자신을 가지라고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소비는 과정도 다채롭다. 최저가 혹은 프리미엄 없이 정가로 샀다는 사실에 뿌듯할 때도 있고, 일련의 과정이 귀찮아 눈앞에 물건을 사버리기도 하니 말이다. 소비도 감각의 일종 같다. 가시광선, 음역대처럼 가용 범위 내에서 잘 샀다 싶을 때가 있고, 저질렀단 표현에 가까운 그 밖의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소비에 게으른 쪽도 있다. 시간과 노동을 교환할 바에야 안 먹고 안 쓰는 편을 택한다. 근검, 절약을 권하는 사회에 미니멀리즘과 만남이랄까. 노동과 교환하지 않아 방어된 시간은 일종의 품위유지비처럼 보인다. 이 부류의 문제는 주량도 마셔봐야 알 수 있듯이 소비도 써봐야 감당할 여력을 아는데 소비에 게으른 자들은 여기에 공백이 있다. 돈도 써봐야 잘 쓴다는 말대로라면 이 단계를 지나야 돈을 잘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물건이란 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진단 걸 알지만, 소개팅에서 마음에 든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 00 카드에서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 찬스란 문자를 보내왔다. 큰 고민 없이 결제를 해버렸는데 묘하게 통쾌하다. 살까 말까 큰 고민 없이 결제할 때의 쾌감.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면세점을 둘러보다 눈에 들어오는 가방이 있다. “면세 금액에 추가 할인으로 시중가에 45% 할인입니다”라는 직원의 설명과 동시에 탑승 마감 10분 전이란 방송이 들린다. 걸쳤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면 결제했을 확률이 높다. 예뻐서로 충분하니 말이다.
고삐 풀렸다 죄는 날이 있고, 한창 죄였기에 살짝 힘 푸는 날도 있다. 드라마 여주는 부스스한 머리에 검은 눈 밑을 하고 있지만 명품가방을 걸친 자신을 보며 살짝 우쭐해진다. 그녀는 그 가방을 갖기로 한다. 그리고 더 많은 가방을 갖기 위해 본업에 충실하기로 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면세점에서 45%의 할인가의 가방을 사 온 게 나다. 사온 가방을 보면서 생각했다. 80만 원 하는 가방을 산다. 이건 아직이다. 날 위해서 40만 원쯤 하는 가방은 살 수 있다. 사 왔으니 팩트다. 금액에 크고 작음이야 사람마다 다르니 차치하고, 요즘 나는 나를 위한 소비에 크기를 늘이는 데 관심을 둔다. 나에게 좋은 대접을 하는 방법으로 소비에 발을 들였다. 그저 예뻐서 샀다, 별 고민 없이 샀다, 그리고 내가 벌어 내가 샀다는 게 통쾌했다. 세 가지의 감상 뒤로 간단한 마음이 하나 더 생겼다. 내돈내산. 깔끔했다. 다음에도 별 고민 없이 사게 부지런히 벌어보자. 아, 잘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