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읽으며 글을 쓰는 소모임이 있는데, 글감이 '여름'이었다. 그래서 쓴다.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날짜도 제대로 도려낸 것이 7월 4일이다. 당연히 미국의 독립 기념일이어서 좋다는 것은 아니고, 7과 4, 이 숫자의 균형이 몹시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도 내가 1974년생인데, 생일이 7월 4일인지라 그 7,4,7,4, 반복의 리듬에 안정감을 느낄 지경이다. 이렇게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이 참 좋다.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내 생일은 늘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나는 늘 교실 맨 끝, 뒷문 옆 복도 쪽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하든지 잠을 자는 척을 했다. 키도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 여자애가 이름까지 '황하나', ㅎ이 겹치고 또 겹쳤으니 학창 시절 내내 끝 번호를 면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학급 인원이 홀수일 때는 짝이 없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게 너무 창피했었다. 혼자 저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더불어 7월 초는 늘 장마였다. 잠깐 해가 반짝 비쳐도, 장마 전선이 몰고 오는 그 습한 기운은 해가 갈수록 더했다. 이미 반세기를 넘게 살아버린 올해, 2024년의 여름도 역대급 더위를 몰고 올 것이다. 해마다 그 기록은 경신된다. 여하튼 생일날 아침에 일어나면 대부분 늘 바깥은 어두웠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든가 태풍이 세상을 쓸고 있었다.
그런데 날씨나 학사일정은 차치하고, 나중에 조금 커서는 듣는 말은 모조리 다 이거였다.
"날을 이날로 받았으면 시간이라도 좀 잘 받지 왜 그랬냐."
그렇다, 사주 이야기다. 사주가 별로 ‘좋지 않다’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었다. 임신하고 만삭이 될 무렵 임신 중독증에 걸린 엄마는 제왕절개수술로 나를 낳았다. 즉, 내가 세상에 나올 순간을 분까지는 몰라도 시간 정도는 일정에 맞출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렇게 의도해서 나를 일찍 혹은 늦게 빼냈더라면 내 팔자가 다림질 하듯 쫙 폈을까. 여하튼 병원 스케줄에 따라 74년 7월 4일 오후 5시 15분에 태어났다. 심지어 음력 생일도 5월 15일이라 이거 더블 찬스로 너무 좋은 숫자다. 그런데, 내 사주를 마주한 사람들은 늘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까. 날짜도 거시기한데, 왜 시간까지 이렇게 호랑이가 어정쩡하게 어슬렁거리는 시간에 태어난 거냐는 이야기이다.
사주팔자, 바로 기둥이 네 개, 글자가 여덟 글자. 그중에 빨간 불이 무려 네 개나 된다. 요즘은 사주풀이 앱이 많아서 내 출생날, 시간을 빈칸에 넣기만 하면 촤라락~ 풀어서 보여준다. 눈으로 봤을 때도 내 사주 팔자는 온통 활활 타오른다. 빨갛다. 내 이름은 빨강, 그 이름같이 내가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타닥! 타닥!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으로 살아왔다. 여기에서 불같이, 불의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그다지 인생이 평탄하게 술술 풀렸다는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특히 2011년은 인생 현재 스코어로 보면 최고로 힘든 해였는데, 그 해가 지나고 1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도 새벽에 자다가 갑자기 걱정거리가 밀려들어올 때가 있다. 그러면 온몸이 불에 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양손부터 위로 타고 올라온다. 그리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서 심호흡을 크게 해야 한다. 어떤 날은 얼마나 심호흡을 해댔는지, 목이 다 아프기도 했다. 아주 심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공황장애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어쩌자고 공황장애 신체화 현상까지도 활활 온몸이 불타는 느낌으로 당첨되었는지… 혹시 내가 불이 아닐까? 나, 즉 불.
수년 전, 여의도에 있는 드라마작가 교육원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드라마 광풍이 불었던지라 지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조를 한 8-9개로 나누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면접장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 면접 대기실에서 ‘주의사항’을 되풀이해서 알려주었는데 이건 아마 늙어서 내가 글을 전혀 쓸 수 없을 때까지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을 것 같다.
“면접 보시는 분들 중에 ‘내 인생이 드라마’라면서 면접관 선생님께 인생 하소연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많습니다. 여기는 면접장입니다. 하소연 금지, 하소연 금지, 아셨죠?”
이날 들은 면접 시 주의사항은 글을 쓰는 데에 사뭇 소중한 지침이 되어주었다. 내가 쓰는 글이 ‘하소연’으로 칠해져서 물거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얼마 전 한 3년 동안 하던 작업이 다 무산이 되고는 조금 힘들었다. 그 시간 동안 폴더에 쌓인 파일만 해도 수백 개였고, 뒤집어라 엎어라 하면서 나온 스토리만 해도 크게는 서너 개, 잘게는 열두 개가 넘었다. 드라마, 영화 제작자가 뭐 하는 사람일까요? 물으면 나는 1초도 머무르지 않고 ‘시나리오 빠꾸 놓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테다. 3년 내내 온갖 짓을 다 해보고, 노력도 하고, 간절하기도 했고, 끝내는 많이 지쳐 버린 터라 우리 팀에서 상상해온 가장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어도 마음이 그다지 많이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쉬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하루는 우리 동네에 자리 잡고 벌써 20년 단골이 된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따르고 아쉬운 속에 들이부었다. 책 집필계약을 했든, 영화를 하기로 했든, 누군가와 일을 도모하든, 혹은 이리 일이 무산되었든 간에 뭔가가 매듭지어지거나 시작될 때는 꼭 혼자 이곳에 고사 지내듯 숨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제깍 일어나 이제는 진짜 ‘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 글은 나에게 돈 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그냥 쓰고 싶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를 불로 설정했다. 중간에 잠시 멈춰서서 혹시 이거 글로 ‘아트’ 한답시고 느끼하게 겉멋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자기 검열도 발동했지만, 지금까지 ‘나’라는 캐릭터가 왜 ‘불’인지는 벌써 지금 A4 용지 한 장 반, 원고지로는 벌써 15장째 쓰고 있지 않은가.
여름이다. 너무나 뜨거운 여름이다. 불이 더 활활 타오를 시절이다. ‘나’라는 불, 최후의 형태는 재다. 아무 짝에 쓸모없을 시커먼 재-숯도 아닌!-가 될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 불꽃으로 돌진하는 것인지. 인생 재가 될지 좆이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지만, 일단 같은 ㅈ자일지라도 좆 되는 것보다야 재 되는 것이 훨씬 처연하고 멋지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이렇게 재로 남으려 오늘도 활활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