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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Sep 01. 2024

내 인생, 썰 풀면 팔만대장경이오...

내 인생이 드라마인 여러분들께...

"이봐요, 의사 선생님. 뭘 잘 모르시나 본데, 인생이라는 거, 그렇게 공평하지가 않아. 
평생이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인 사람도 있고, 죽어라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인 사람도 있어. 알아들어?"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 나오는 대사인데, 몹시 좋아한다. 이 작가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걸까 상상해 보게 되는 대사다. 이 정도의 끝을 보고 대사로 옮겨올 줄 아는 작가라면... 그 삶의 연륜은 적어도 나이테 열몇 개 정도는 아닐 것이다.  또한 죽어라 달렸는데 끝이 낭떠러지면 어떡하나 하고, 참도 열심히 달리는 오늘이다.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휴일'로 지정했다. 프리랜서인 나에게 스스로 주는 '휴일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 삶의 스킬이라는 것을 나이 점점 먹어가면서 알게 된다. 몸이 안 따른다, 매일 일 하려니...)


어제는 조금 일찍 잠이 들어서 새벽에 깼다. 새벽은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시간, 이 생각 저 생각 상념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렇다. 영차! 하고 일어나서 새벽 조깅을 나가거나, 걷기를 해도 좋으련만, 영 그 텐션까지는 올라오지 않는다. 그렇게 누워 밍기적대면서 지난 6월에 다쳤는데도 아직도 별 차도 없이 쓰라리게 아픈 오른 손가락 걱정부터 시작해서(잘라내야 하나? 하는 별 생각...) 지금 이 삶의 방향이 맞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이 질문까지 스멀스멀 올라온다.


요즘 <세이노의 가르침>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 성우가 "웃기고들 있네." "이런 못돼 먹은 새끼들!" "꿈 깨라!" 등등 험한 소리 돌직구도 너무나 재밌게 잘 읽어줘서 더더욱 흥미를 붙여버렸다. 

수많은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금 내가 이렇게 전업 작가 입네~ 하고 앉아서 하루종일 글만 써도 되는 일인가 생각을 해봤다. 지금 몇 년째 드라마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 프로젝트로는 3년째 돈 1장도 못 벌고 있다. 버틴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나리오, 드라마 쓰면서 앞으로 내가 화당 천 넘게 받는 스타 작가가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하다. (그렇다고 내가 능력 없는 작가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글솜씨도, 의지와 감각도, 맷집도, 실패 경험도 어느 정도 쌓여 있는 터라 그 어떤 청춘 작가들보다 함께 일해보면 나은 결과물을 낼 것이라는 자신도 있다. 그래도 현실을 보자.) 


그렇다면, 얼른 돈 되는 글을 먼저 쓰던지 투 잡, 쓰리 잡을 뛰어서라도 빚을 먼저 청산해야 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재테크는 얼른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에 오로지 글쓰기에 매진했는데, 이제는 조금 더 영리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신새벽에... 

내 인생은 투자로 돈을 벌기 전에 일단 빚 갚고, 돈을 모아야 하는 아주 초입의 단계인 것을 절감했다. 드디어 내 주제 파악이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글을 지금처럼 줄기차게 계속 쓰면서도 조금 더 힘을 내야 한다,  다시 알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글을 쓰는 본업과는 조금 거리가 먼, 몸을 쓰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나마 아이들이 좀 커서 시간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황섬, 파이팅! (혼자서 주먹 꽉!)


주식을 배우겠다고 등록을 했다가 지난여름, 다른 일들에 치여서 수업 한 기수를 그냥 넘겼다. 교과서라도 받아두자, 그리고 내가 수업을 과연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가늠이나 해보자 할 요량으로 토요일 아침 일찍 채비를 해서 떠났다. 화장을 마치니 갑자기 눈이 간질간질했다. 충혈이 된 것은 아닌데 너무 간지럽다. 아이라이너까지 다 그려놓은 통에 긁지도, 문지르지도 못하고 그냥 꾹 참고 출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요일에 원고 마감한 여파인지 몹시 피곤했다. 그래도 견디고 석계역에 도착했는데, 어? 눈이 안 보인다! 급박하게 카메라를 켜서 셀카 모드로 내 얼굴을 보니... 세상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 <마음의 소리> 애봉이가 눈 반쯤 감긴 것 정도로 상상하면 될 것 같다. 


'그래도 좀 있다가 가라앉겠지'하고 억지로 릴랙스 하고는 심호흡과 함께 종로까지 앞으로, 앞으로... 눈이 이렇게 무거울 일인가. 먹은 것도 별로 없었고, 매일 먹는 단백질 셰이크 정도인데... 누구에게나 알레르기는 원인 모르면 무섭고, 불편한 질환이다. 다시 건너편 열차를 타고 집 쪽으로 되돌아갔다. 피부과를 찾았는데, 1시 30분이 넘은 터라 다들 접수 완료된 터라 그냥 퉁퉁 부은 얼굴을 안고(그야 말로 목 위에 얹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따끈한 차를 한잔 타서 마시며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런저런 길을 알아보고 있는 와중... 역시 드라마나 영화는 말이다 결론으로 치닿는 후반부에 한 번 더! 주인공이 역경을 겪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타이밍이 꼭 온다. 아, 이제 다 왔다... 하고 관객들이 휴우~ 하고 안심할 무렵... 그 잠시의 평온을 놀리기라도 하듯 뻥! 하고 이야기의 폭탄을 터뜨린다. 혹은 후반부에 주인공의 불운이 '그동안의 일 따위는 껌이었지롱' 하듯 몰아치며 파멸로 끝나는 방식도 트렌드다. 

우리 혜성이가 한 이틀 열감기로 고생을 많이 했다가 리틀 야구 가고 싶다고 할머니네 집에 간 사이, 병원에서 폐렴 판정을 받았다.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단다. 내일 오전 종합병원 외래로 가서 입원을 시키고 다시 파이팅을 해보는 거다. 



수년 전, 여의도에 있는 한 드라마 작법 배우는 곳에 등록을 하려면 면접을 봐야 했었다. 얼마나 지망생들이 많은지 선생님들이 '될성부른 떡잎'들을 한 번 거르는 거다. 다들 몇 조로 나누어 줄을 서서 면접을 볼 차례를 두근두근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면접을 보는 사람들 줄을 세우면서 안으로 번호 불러 안내하는 분이 우리들에게 '면접 시 주의사항'을 고지하는데... 

"여기 계시는 분들, 여기는 면접 보는 곳입니다. 절대, '내 인생이 드라마'라면서 면접관 선생님들 앞에서 자기 인생 하소연을 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대기 인원이 많아 시간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하도 웃겨서 피식 웃었다. 도대체 여기에서 어떤 인생 썰들을 굽이굽이 풀어놓았기에 저렇게 면접 시 주의 사항 넘버 원으로 알려주는 것일까. 그 풀어놓으면 팔만대장경인 내 인생을 그렇게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서 모이는 사람들 중 끝까지 남는 사람이 위너가 되는 것일까. 내 작품 하나 남기고 싶은 마음, 그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욕도 얻어먹고, 이리저리 상처도 입고, 걸레 누더기가 된 내 시나리오를 들고 울기도 하면서 끝까지 남는 사람들... 참 멋있다. 터널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목표를 가지고 질주하는 사람들.... 

그것이 꼭 작가가 아니어도 좋다. 다른 어떤 직업이라도, 어떤 일 하지 않는 삶이라도 모두 똑같다. 목표만 있다면... 목표가 없어도 좋지. 오늘을 꽉 채워 살고 있다면...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하루하루 뭔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쉬는 것은 게으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온통 뒤덮인 나라다. 늦잠을 자면, 하루라도 쉬면 죄책감이 드는 이유와 상통한다. 


아, 시나리오 마감을 하고 조용히 쉴만했더니, 아들의 폐렴 소식이라니... 이런 인생 드라마가 또 어딨냐 하는 이야기를 쓰다가 삼천포로 잠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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