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가 하얀 편이다. 콧대가 낮고 길이도 짧은데 코끝이 둥글다. 작은 입에 입술까지 도톰해서 전반적으로 귀여운 인상이다. 비율은 좋은 편이어서 목도 길쭉하고 팔다리도 길쭉한데 배가 통통하다. 밥을 먹고 나면 배가 한없이 커져서 그대로 침대에 누우면 개구리가 만세 하는 것 같다. 머리숱이 적어서 고민인데 다리에는 쓸데없이 털이 많다. 키는 중간이고 나이는 마흔이 넘었다.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우리 집 귀염둥이는 바로 남편이다. 처음부터 귀염둥이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물론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우리 부부에게도 칼바람이 불던 시기가 있었다.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성격차이'였다. 알아서 배려하고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나에 반해 남편은 직설적이고 주관이 뚜렷하여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불만이나 서운한 점을 여러 번 얘기해도 아랑곳 않는 모습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사소한 오해가 쌓여 나는 내가 남편에게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대화는 겉돌기만 했다.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한 협조는 열심히 했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 침대에서 자다가 서로의 몸이 닿으면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눕던 때였다.
어느 날 인터넷 게시판에서 글 하나를 보았다. 아주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아버지께 '삐약이씨' 아니면 '깜찍이씨'등 여리고 귀여운 느낌의 애칭을 지어 불러드렸더니 점점 행동이나 말투가 부드러워지고 관심받는 것에 기쁨을 느끼더라는 것이었다. 호칭 하나로 사람이 달라진다고? 백 프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도해 볼 만했다. 나는 말의 힘과 글의 힘을 믿는 사람이 아니던가? 내 말에 어떤 힘을 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남편을 귀염둥이라 불렀다. 특히 내게 관심을 주거나 잘해줄 때면 더 정성을 들여 호칭을 사용했다. 자기를 가스라이팅 하는 거냐며 질색하던 남편도 곧 익숙해졌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즐기는 것 같았다. 장난 삼아 부르던 나도 나중에는 진심이 되었다. 그림자만 봐도 귀여워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을. 남편은 내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고 도와줄 게 없냐고 자주 물었다. 집에 와서 나랑 함께하는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부부금슬 되살리는 방도라 하기에는 허무할 정도로 쉬운 방법이었다.
물론 호칭이 우리를 변화시킨 것은 아닐 거다. 서로에 대한 진심이 밖으로 나온 거지. 하지만 호칭 덕에 기회를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남편을 귀염둥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아이들은 처음에 질색했다. 엄마 편향이 심한 아이들이라 더 그랬다. 배불뚝이 아빠가 어디가 귀엽냐는 거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아빠가 언젠가 대머리가 될 거라는 것을 알려주자 첫째는 거의 오열했다. 엄마는 왜 대머리에 배불뚝이 아빠를 선택했냐는 거였다. 생각해 보니 진짜로 나는 남편이 대머리가 될 거라는 걸 연애할 때부터 알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 정도면 찐 사랑 아닌가?) 지금은 아빠를 조금은 귀여운 면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자기 간식을 몰래 훔쳐 먹는 아빠. 쫓아가 바가지를 퍼부으면 달래주는 척 *이소에 데려가 쓸데없이 예쁜 것들 실컷 사주는 아빠. 엄마가 화낼 때 옆에서 같이 혼나는 아빠.
지난봄 친정 엄마와 경주로 여행을 갔다. 아이들은 외할머니 옆에 붙어서 재잘재잘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남편과 둘이 함께 앉고 함께 걷는 시간이 많아 방심했나 보다.
"우리 귀염둥이 이거 먹어봐." 고기 한 점을 남편에게 주며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친정 엄마는 애들한테 하는 말인 줄 아시고 아이들을 쳐다보셨지만 남편은 얼음이 되어 굳었다. 이내
"에헤이 이 사람이 왜 이래~"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차차. 배 나온 개구리. 내 눈에만 귀염둥이라는 것을 또 잊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