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에 첫째가 내일 아침을 일찍 차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학예회 준비 때문에 학교에 일찍 가야 한다고 했다. 냉동만두를 데워먹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반색했다. 접시에 냉동만두를 놓고 물을 살짝 적셔준 다음 레인지용 덮개를 씌워 3분 정도 돌리면 된다고 알려주고 잤다.
이른 새벽 부산스러운 소리가 나는 듯싶더니 이내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알려준 대로 꼬박꼬박 잘하는 것도 기특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을 챙겨 먹겠다는 의지가 사랑스러워 피식 웃음이 났다. 인사를 해주려 했는데, 눈이 다시 감기는가 싶더니 둘째가 다정한 손길로 나를 깨운다.
"어머니. 벌써 7시 45분이에요. 밥 주셔야죠." (밥 달라고 할 때 극존칭을 잊지 않는 둘째다.)
어머나! 첫째 가는 것도 못 보고 한 시간을 더 자버린 거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앞치마를 둘렀다. 앞치마만 두르면 손이 빨라지고 발은 자동으로 스텝을 밟는다. 최신형 앞치마에 숨겨진 기능이다.
아침 준비가 늦다 싶었는지 둘째 셋째는 알아서 책가방을 싸고 옷도 입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정성껏 끓인 떡만둣국을 내어주자마자 한 그릇씩 뚝딱 해치웠다.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고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뿌리며 뛰어나갔다.
밥 차려주는 거 말고는 엄마 손길 하나 없이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다 문득 5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어린이집, 유치원 등원 준비하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껌처럼 들러붙는 애셋을 요령 있게 떼어가며 아침 준비를 하다 보면 하나는 꼭 울었다. 겨우 달래 식탁에 앉히고 밥 차려주면 먹는 거 반 흘리는 거 반. 보다 못해 밥그릇 하나에 숟가락 하나로 애셋을 돌아가며 먹였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한 방향으로 돌면 되는데, 가끔 오류가 나면 누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먹기 싫은 녀석은 먹었다고 우겼고 더 먹고 싶은 녀석은 안 먹었다고 우겼다. (살찐 녀석이 범인이었다.)
다음 미션은 머리 묶어주기. 다른 엄마들은 머리를 예쁘게 묶던데 나는 그야말로 똥손이었다. 나름 애를 써서 머리를 위로 묶으면 추노꾼이냐 물었고 아래로 묶으면 청학동 도령이냐고 물었다. 친한 언니들 말이었는데, 표현력에 탄복해 나는 박장대소했다. 추노꾼을 등원시켰는데 예쁘고 단정한 애를 하원시켜 주시는 어린이집 선생님께는 무한 감사를 드렸다. 한참을 버티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미용실에 데려가 셋다 똑 단발로 잘라주었다. 어린 막내는 사탕 하나에 머리를 팔고도 웃었고 둥이는 뒤늦게 엄마 밉다고 울었다.
옷도 문제였다. 여자아이들은 보통 5세 전후로 치명적인 병을 앓는다. 이른바 '공주병'. 딸 셋 키우는 나에게 가장 암담했던 시기가 언제냐 물으면 나는 그때라고 답하겠다. 드레스를 입으면 구두도 신어야 하고 머리에 왕관이나 하다못해 핀이라도 꼽아야 한다. 모두 핑크색이어야 하고 리본은 옆 공주님 것보다 커야 해서 고객님들 취향 맞춰드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타이즈는 또 왜 이렇게 쫀쫀한 지 1분 1초가 아쉬운 나에게 옷 갈아입히기는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공주병 시기가 지나간 이후로 드레스 따위는 우리 집 현관을 절대 넘지 못했다.
어린이집 안 간다고 우는 애를 선생님께 맡기고 나오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던 시절이었다. 육아의 터널에 갇혔는데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육아를 힘들어하는 내게육아선배들은 애들은 금방 큰다며 위로해 줬지만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작고 미숙한데 어떻게 금방 큰다는 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손이 안 닿는 데가 없는데 언제 큰다는 거야?'
어깨 한 번 피지 못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못난 엄마라며 자책했던 여리고 어리석던 과거의 내가 안쓰러워 코끝이 아렸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라도 '과거의 나'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 본다.
"딱 5년만 버티렴. 네 아이 셋 정말 잘 자랐어. 알아서 다 하고 밥도 잘 먹고 물도 안 쏟아.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눈으로 매일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줘."
'미래의 나'가 해주는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을 거다.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