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F다. 그것도 대문자 F. 툭하면 감상에 젖고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자 이제 울 시간이야.'라는 메시지가 뜨면 나는 자동으로 운다. 장례식, 졸업식, 결혼식, 돌잔치, 모든 관혼상제 의식에 눈물이 터지는데 그중 최고는 결혼식이다. 누군가 편지를 읽기 시작하면 게임 끝이다. 작년에 사촌 조카 결혼식에서도 역시나였다. 주례 없이 하는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서로에게 직접 쓴 편지를 읽어주는 차례였다. 신랑신부가 마이크를 받고 편지를 펼치기만 했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어찌나 울었던지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자분이 혼주인 사촌 언니에게 가서 저 여자 누구길래 저렇게 사연 있는 여자처럼 우는 거냐고 물었다고 했다.
막내 유치원 졸업식은 또 어떻고. 원장님이 축사를 읽으시며 울컥 감정이 올라오신 목소리를 신호로 나는 오열했다. 눈물콧물 범벅이 되는 바람에 나중에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식장을 나서야 했다.
감정이 풍부해서 우는 게 무슨 대수냐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이 40 넘은 어른이 되어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면구스러울 때가 많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 특히 그랬다. (아이들이 엄마 괜찮냐며 달래줄 때의 느낌이란.) 또 우리 가족끼리만 있을 때도 멋쩍은 순간들이 있다. 나만 빼고 다 T들이라 토이 스토리나 인사이드 아웃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다 울고 있으면 눈알 여덟 쌍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관람하고 있다. 어떤 포인트가 슬펐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눈물 버튼이 저렇게나 많은데 모르겠다고?
고쳐보려고 노력을 했더니 요령이 생긴 듯했다.눈치를 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 나오면 방에 가서 찔끔 울고 나온다. 영화관 같이 자리를 피할 수 없는 때에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발가락에 집중한다.시선을 돌리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노력 덕분인지 한 동안 수도꼭지가 열린 적이 없어서 이제 오열을 끊은 줄만 알았다. 이사건이 있기 전까지.
이른바 '서프라이즈 편지' 사건. 첫째 5학년 사회 수업 중에 임진왜란에 대한 단원이 있나 보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전쟁에 나가면서 부모님께 편지 쓰는 활동이 있으니 부모님이 답장을 보내주시면 서프라이즈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다. 영상편지나 손 편지, 메모 어느 것이든 좋다고 하셨다. 가뜩이나 친구 없는 우리 첫째 기 살려줄 방도를 찾던 내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창 재미있는 것을 좋아할 나이니 개그코드를 섞어서 재미있게 영상편지를 만들어 보내기로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나는 딸 셋의 생모가 아니던가. (출산과 기억력 감퇴에 관해서라면 논문도 쓰겠다.) 기억력 감퇴는 예전에 시작된 일이고, 집 나간 정신머리는 대체 어디서 찾아온다는 말인가? 며칠째 편지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고 운동 다녀오는 길, 학교종이에 메시지가 떴다.
'편지를 보내주신 어머님들 감사합니다.' 오늘이 마감이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허겁지겁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편지지를 꺼내 일필휘지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마감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글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계획했던 유머는커녕 가짜 편지를 쓰면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글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나는 자식을 전장에 보낸 어미가 되어 있었다. 5분도 안되어 완성한 짧은 글에 담긴 애끓는 마음과 사랑은 진짜였다. 한 번 고양된 마음은 식을 줄 몰랐다.
편지 사진을 찍어 학교종이에 늦어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올리고, '이제 됐다.' 한숨 한 번 내쉬고 눈을 훔쳤다. '신에게는 아직닦아야 할 열두개의 빈접시가 있습니다.' 비장하게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는데, 어라?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 거다. 어깨까지 아래위로 흔들렸다. 결국 나는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고 말았다.
문제의 가상편지다
집에 아무도 없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산발한 채 소리 지르며 들어와 글자 몇 자 적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내는 엄마. 그것도 모자라 설거지하다 말고 이순신 장군에 빙의되어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는 엄마가 제정신으로 보일리 만무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