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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잡혀 사는 이유

by 주원

쌈닭이었다. 함부로 며느리발톱을 드러내지 않지만 링 위에 올랐다 하면 내일은 없다. 내가 옆에서 본 남편은 그랬다. 쌈닭 기질 남편이 있다는 것은 꽤나 든든한 일이다. 거친 세상에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그 강렬한 에너지가 내게 향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다행히 우리는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내 덕이다. 나는 웬만하면 no가 없고 식탐도 없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남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성격이다 보니 보통은 (까다로운) 남편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데를 간다. 남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별로 힘들지 않다. 물론 가끔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화를 내기도 한다. 지난 내 생일에 선물을 사준답시고 아웃렛에 데려가서는 자기 골프웨어 매장만 세 군데를 돌기에 집어치우라고 했다.


남편은 자기만큼 훌륭한 남편이 어디 있냐고 매번 큰소리를 치지만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챙기기를 하나. 생일이라고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기를 하나. 낭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도 없는 남자다. 쓰레기 한 번 버려주기를 하나 애랑 놀아주기를 하나. 잠만 자고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와서 또 잠만 자고 간다. 주말에는 어떻고?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 입으로만 육아를 한다. (대한민국 가장의 고달픈 현주소는 지금 따지지 말기로 하자) 그렇다고 처가에 잘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명절에 친정에 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만 있다. 배불리 먹고 TV를 켜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고 친정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베개 하나를 내어주신다. 못 이기는 척 곱게 누운 남편의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다 갑자기 탱크 급발진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때쯤 되면 본인 코 고는 소리에 놀라 스스로 깬다.


이런 얘기를 듣고 지인이 내게 도박빚이라도 있냐며 왜 이렇게 남편에게 잡혀 사냐고 물었다. 요즘 남편들 같지 않게 가부장적이고 나는 너무 순종적이어서 부부관계에 균형이 맞지 않다는 거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남편이 가부장적인 면이 있는 것도 맞고 내가 남편 말을 거의 다 들어주는 것도 맞다. 하지만 부부 사이는 세상에 많은 인간관계만큼 다양하고 복잡해서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우리 집의 실상은 이렇다.


최근에 아이들과 친구 사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조언해 줄 만한 내용이 있어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은 엄마가 말하기 시작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경청한다. 듣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공손히 질문하고 대답을 듣는다. 우리의 대화를 한참 듣고 있던 남편이 해줄 말이 떠올랐는지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아빠 때는 말이야."


그러자 갑자기 아이들이 일시에 아빠 쪽을 바라보며 준엄하게 말했다.


"아빠 잠깐 조용히 해주세요. 지금 엄마 말씀 중이시잖아요."


그렇다. 남편은 딸들에게 완전히 잡혀 산다. 우리 집 최상위 포식자는 딸들이고, 딸들은 내게 충성을 다한다. 먹고 먹히는 생태계의 구성은 우리 집에서 완전히 구현된다.


들어는 봤나? 쌈닭보다 무서운 게 암탉이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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