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가 좋겠어. A8시리즈. 안전성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큰 차가 낫지. 어떤 색이 좋을까? 아무래도 흰색이 낫겠지? 당신 세단은 무조건 흰색이나 검은색 선호하잖아. 나는 실버가 멋져 보이던데."
진지한 표정으로 차 옵션을 하나하나 살피는 남편의 안경너머 눈빛이 꽤나 날카롭다.
남자들은 대부분 차를 좋아한다지만 이 남자는 정도가 심하다. 모든 차종에 관심이 있다. 차의 디자인뿐 아니라 주행성능, 내부 부품, 풀체인지 예정 정보까지 꿰고 있다. 엔지니어의 직업적 특성도 한몫했으리라.
문제는 저렇게 디테일한 차 쇼핑을 매일 한다는 거다. 차종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옆자리에 누운 죄로 매일 밤 저 브리핑을 들어야 한다. 정말 차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면 나도 진지하게 듣고 의견이라도 내겠는데 그건 아니다. 그저 손가락 두 개와 입으로만 차를 샀다 팔았다 한다. 매일 내게 차 얘기를 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남편을 이해시키기 위해 명품 가방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여보. 샤○이 낫겠어? ○르메스가 낫겠어?"
어리둥절한 남편에게 다시 말했다.
"그봐. 하나도 모르겠지? 관심도 없지? 나도 똑같아. 부탁인데 나한테 차 얘기하지 말아 줘." 그러자 남편은,
"뭐가 제일 비싸? ○르메스? 역시 비싼 게 예쁘네. 됐지? 이제 어떤 차가 더 멋있는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줘." (이런 진상.)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차가 제일 비싸? 이거야? 그래. 그게 제일 멋지네."
그러자 남편 왈.
"부○티? 이야. 우리 여보 눈 높네. 비싼 차 좋아하네." 그러면서 늘 마지막으로 하는 말.
"아! 우리가 애만 없었으면 포르○타는 건데!"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어도 그렇지. 평생 타보지도 못할 차를 꿈꾸느라 이미 낳은 애를 에미 뱃속에 넣었다 뺐다 하는 애비가 어디 있냐 말이다. 기도 안 찼다. 발끈해서 째려보니 남편은 슬그머니 돌아누워 중고차 매매 어플을 켰다. 보나 마나 사고 싶다던 차 견적을 내는 것이다. 피곤하다면서 잠도 안 자고 저러고 싶을까? 사지도 않을 차를 클릭하고 옵션을 넣었다 뺐다 하며 가격을 확인한다. 다른 마음에 드는 차가 나타나면 차종만 바꿔 매일 밤 반복한다. 한 십분 그러는가 싶더니 핸드폰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이 들었다는 신호다. 핸드폰을 옆으로 치우고 안경도 벗겨주었다. 오늘은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뻗은 걸 보니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혀를 쯧쯧 차고 나도 잠을 청했는데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한창 사고 싶은 게 많을 20대 때, 자기는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몇 천만 원어치 담아놨다던 친구가 있었다. 그게 무슨 지렁이 콧구멍 같은 소리인가 했는데 남편을 보니 그 친구 마음이 조금 이해될 것도 같았다.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생활. 아무리 일 해도 벌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고 아이들은 계속 자란다. 어른의 취향이나 소망 같은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간다. 내가 책을 사고 영화를 보며 행복에 젖듯, 잠시라도 고단한 현실을 잊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아이템이 그에게는 차인 모양이다. 매일 밤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잠이 든 남편은 꿈에서라도 그 차들을 타볼 수 있을까? 슈퍼카를 타고 빈 디젤 처럼 분노의 질주를 하는 남편을 생각하니 조금 웃겼다. (숱 없는 머리만 닮았다.)
출처: 픽사베이 내 장바구니에 담긴 두부나 콩나물에 비하면 남편의 장바구니가 조금 사치스럽기는 하다만 뭐 어떤가. 오늘 밤엔 가장의 무게 같은 거 슈퍼카 트렁크에나 싣고 맘껏 달려보라지!
오늘따라 어려보이는 남편의 옆얼굴이 아이처럼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