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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 제삿날

by 주원 Dec 04. 2024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것을 잘 챙기지 않는 나지만 이번은 남편이 좀 심했다. 회사 후배한 잔 하러 나가겠다는 걸 보니 오늘이 결혼기념일인걸 까맣게 잊은 눈치다. 기념일이 뭔 대수냐 싶기도 하고 만나겠다는 회사 후배도 내가 아는 사람이라 딱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후에 겨울 여행을 가니 마니 하는 문제로 언쟁을 벌이고는 제대로 화해도 안 했는데 저녁때 홀랑 나가버리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상의도 안 하고 약속부터 잡은 다음 내게 통보했다 이거지? 이따 들어와서 사과해도 내가 받아주나 봐라.'


 생각해 보  작년 결혼기념일 새벽에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셨던 분이 바로 저분이  아니신가! 슬슬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


 11시 30분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났다. 중문 닫히는 소리가 늦는 것을 보니 동작이 늘어지고 있다는 뜻.  거실 복도로 들어와서는 양말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주 스케이트라도 타는 모양이다. 발걸음 소리에 묻어나는 술냄새가 거나하다.


 그 와중에 아이들 자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는 것은 잊지 않는다. (아이들 태어나고 하루도 잊지 않는 루틴이다.)


 안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이불을 귀까지 덮어쓰고 돌아누었다.


'흥!'


흥분한 고릴라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점퍼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판 더 하자는 건가?' 고민하는 사이 남편이 씻으러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남편이 나와서 시비를 걸면 대응할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손만 대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명료하고 완벽하다. (남자들이  말싸움으로 여자 절대 이길 수 없는 이유다.)


 긴 샤워 끝고 남편이 나왔다. 흐느적거리며 옷을 꿰어 입더니 침대로 다가왔다. 요란한 숨소리는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았다. 남편이 내 팔을 잡고 흔드는 것을 신호로, 나는 힘껏 당겨진 용수철이 제자리로 돌아가듯 몸을 튕겨 돌았다. 


"여보 미안해. 아까는 당신이 자꾸 여행을 간다고 해서 내가 기분이  안 좋았어."


 씨근덕거리던 품새와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온 사과가 너무 순했다. 내 머릿속에 떠있던 논리회로가 펑하고 터져버렸다. 사람 속 뒤집어 놓고 사과 한마디로  때우니 참 쉽기도 하다.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남편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세상 평화롭게 잠자리로 파고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싸우고 싶었던 것 같다. 명분도 있었고 방비도 단단히 했다. 하지만 싸울 의지가 없는 상대에게 내 전의는 통하지 않았다.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분기탱천했던 내 기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하며 나를 끌어당기는 남편에게 못 이기는 척 팔 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다.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놀던 쌍둥이 휴대폰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애들이 놀라 안방으로 달려와 아빠를 깨웠다.


"아빠! 아빠! 오늘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인 거 알고 있어요?" 남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야. 오늘 1일이잖아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은 5일이야."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깨웠다.


"엄마! 엄마! 우리 휴대폰에 오늘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라고 뜨는데 오늘 아니에요?"


 들도 기억하는 날짜를 모르나 싶어 혀를 차는데, 불현듯 스치는 생각. 작년 결혼기념일 전날에도 남편이랑 술을 마신 사람이 어제 그 후배였다.


"당신 5일에 어떤 여자랑 결혼했니?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00 씨랑 술 마셨더라." 하니 남편이 그제야 깨달은 듯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맞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네. 어쩜 내가 2년 연속 결혼기념일 전날 술을 마셨네."


아이고 뉘 집 아들인가 해맑기도 하다.


"여보 이제 12월 1일은 우리 결혼기념일이 아니야."

"그럼 무슨 날인데?" 하고 묻는 남편에게 말했다.


"무슨 날이긴. 네놈 제삿날이지."


사진출처: 픽사베이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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