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따뜻하더니 아침에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급하게 옷장을 뒤져 지난겨울에 입던 점퍼를 꺼내 아이들에게 입혀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첫째 소매가 짧아져 작다 싶은데,
"엄마. 이 옷 저한테 작은 거 아니에요?" 한다.
"아니야. 소매가 조금 짧긴 한데 괜찮아. 딱 입을 수 있는 정도야."하고 재빨리 입을 막고 등 떠밀어 학교에 보냈다. 다른 아이라면 질색할 상황이었지만 우리 첫째는 갸우뚱 한 번 하고는 바로 납득한 눈치다. 아직도 바지를 거꾸로 입고 양말 짝이 안 맞아도 한 번 신었으면 그냥 나가는 아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애는 보냈지만 아차 싶어 얼른 쇼핑몰 어플을 켰다. 초겨울에 입을만한 점퍼를 검색했다. 아니 왜 싼 옷은 눈에 안 차고, 괜찮다 싶은 것은 비싸고, 이것저것 따져 적합하다 싶으면 사이즈 재고가 없냐 말이다. 보통 쌍둥이 것 두 개에 막내 것까지 세 개를 구매하는 때가 많은데 고르고 골라 장바구니에 담을 때 재고 없음 알람이 뜨면 분노가 폭발한다.
딱히 마땅한 옷을 찾지 못해 어플을 닫고 잠시 다른 일을 하다 깜박하고 말았다. 오후에 집에 온 첫째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헤벌쭉 웃으며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옷이 작아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옷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옷에 관심이 없고 무던한 것이 이럴 때는 참 편하다.
이번에는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만 평소에도 아이가 옷차림에 관심이 없어 신경이 쓰인다. 일단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안 불편하냐는 거였다. 옷을 잘 못 입고 가서 불편하면 개선을 할 텐데 우리 첫째는 반응이 없었다. 바지를 거꾸로 입고 간 날도 주머니 위치가 바뀌었을 텐데 상관없다고 했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간 날도 아무도 못 알아봤다며 아무렇지 않아 했다. (못 알아봤을 리가 없잖아.)더 어렸을 때 겨울 내복을 두 벌 껴입고 갔을 때도 집에 와서야 두벌 껴입은 것을 알아채고 어쩐지 바지가 잘 안 내려가더라고 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가뜩이나 내성적인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 놀림을 받을까 걱정이 되었다. 학교 다닐 때 사소한 트집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씩씩한 친구들이야 실수를 하고 놀림을 받아도 웃고 그만이지만 우리 아이는 같이 웃어줄 단짝 친구가 없다. 흰 양말 검정 양말을 왼쪽 오른쪽에 신고 등교하는 우리 아이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을 상상하니 아찔해졌다.
엄마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간식을 먹고엄마 사랑해요를 백번쯤 외치고 나서야 피아노 학원에 간다고 집을 나섰다. 배웅해 주려고 나가는 아이 모습을 보니 아침보다 소매가 더 짧아 보였다. 애가 그새 더 컸나?
'아니 크라고 할 때는 안 크고 갑자기 크기라도 한 거야 뭐야?'하고 다시 보니 한참 이상하다.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애를 낚아채듯 잡아 점퍼 목 뒤를 올려 확인하니, 사이즈 130. 동생 옷을 입고 나온 거다. 순간 열이 오르며 고성이 튀어나왔다.
"아니. 너는 145짜리 네 옷도 작아서 못 입게 생겼는데 어쩌자고 130을 입고 나온 거야. 불편하지도 않아? 이상한 거 못 느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