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유행했던 MBTI 성격유형검사를 온 가족이 해보았다. 사람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검사결과 나온 유형이 제법 성격에 근접했다. 성격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에 쾌감도 느껴졌다. 이를테면 남편은 ISTJ이고 나는 INFP이다. 내향형(I)이라는 것 말고는 모두 달랐다. 어느 하나 맞는 구석이 없는 우리 부부의 관계를 너무나 잘 보여준달까? 성격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남편의 성격유형 중 'T'라는 놈이 불편하다. 데인게 있어서 그렇다. 논리적, 분석적, 객관적 판단에 관심을 갖는다는 T 남편의 언어는 아직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나는 관계지향적인 사람이라 상대에게 불편할 것 같은 말은 목구멍에서 아예 꺼내질 않는다. 반면에 남편은 '아니 어쩜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생각할 법한 말도 잘한다.
까마득한 연애시절,
"자기 지금 피부가 쓰다 버린 랩이나 포일 같아."
(내 피부가 너무 건조하고 쭈글거린다는 뜻)
"자기야. 치마 입지 말고 바지 입어. 균형이 안 맞아서 타조 같아."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 보기 흉하다는 뜻)
"자기 집에서 부모님이 영양공급에 너무 신경 안 쓰시는 거 아니야?"
(너무 말랐는데 혹시 집에서 굶기냐는 뜻)
나를 화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 왜 그런 말들을 했는고 하니
첫째, 뇌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말을 걸러주는 필터가 없고
둘째, 사회성과 담쌓은 자의 어휘 수준을 지녔고
셋째, 할 말이 생기면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 같은 것은 고려하지 못하고 꼭 말을 해줘야 한다는 몹쓸 의무감 같은 게 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한참 외모에 관심 있을 때 들은 신랄한 평가가 당혹스러웠다. 뭐 피부가 어쩌고 저째? 여자 친구보고 타조 같다니! 또 뭐? 엄마가 안 챙겨주시냐고? 참 어이가 없었다. 내가 불쾌해하면 남자친구는 (현 남편)은 적반하장이었다. 자기의 의도를 곡해했으니 내 잘못이라는 거였다. (말이야 방귀야?)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결혼까지 했나 싶다. 사랑이 위대한 건지 내가 대인배였던 건지는 알 길이 없다. 지지고 볶으며 연애와 결혼을 합쳐 20여 년을 함께한 지금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저 화법은 아직도 잊을만하면 나타난다. 그리고 문제는 아이들 셋이 죄다 아빠를 닮았다는 거다.
우리 집에 난무하는 T의 언어는 참으로 놀랍다. 아이들이 아빠와 다른 게 있다면 천진함 정도? 아이다운 순진함으로 무례와 영악을 넘나드는 T의 언어는 맵다 못해 아찔할 지경이다.
예를 들면,
한 번은 시어머니가 건망증으로 실수한 일화를 얘기하셨다. 이렇게 자꾸 깜박깜박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며 첫째를 쳐다보셨다. 첫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 그건 늙어서 그래요."
"......."
알지 알다마다. 나도 알고 아비도 알고 어머님도 안다. 다만 입 밖에 내지 못할 뿐.
한 번은 남편이랑 마트에 가서 언쟁이 있었다. 내가 반가운 친구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깜박하고 차 문을 안 잠근 상황. 남편은 아무리 반가워도 그렇지 어떻게 차 문을 안 잠그냐고 타박했다. 남편의 사소한 실수는 언급조차 안 하는 나와 달리 실수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남편이 너무 얄미웠다. 당신 아주 잘났다며 쏘아붙이고는 뒤돌아섰는데 막내가 쪼르르 따라오더니 말했다.
"엄마가 먼저 잘못하기는 했지만 아빠가 더 잘못했으니 제가 달래 드릴게요. 기분 푸세요."
(그래 아빠 잘못이 더 크다고 해줘서 엄청나게 고맙다.)
최근에는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암 방사선 치료를 받고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던 친정 아빠가 최근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 폐와 간 기능이 떨어지고 급성 심부전으로 호흡이 어려워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고 아빠도 너무 힘드셨는지 삶의 의욕을 잃으셨다. 온 가족이 애간장을 태웠는데 다행히 회복이 되셨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하며 아빠를 위로하는데, 막내가 소곤소곤 속삭이며 하는 말.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이 집은 누가 갖는 거예요?
"00아. 왜 갑자기 그걸 물어?"
"할아버지가 주인인데 돌아가시면 누구 거 되는지 궁금해서요. 혹시 줄 사람 없으면 이 집 저 주시면 안 돼요?"
(허를 찌르는 대담한 야심의 소유자였다.)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이렇게 맹랑한 손녀를 두고 이별을 생각했던 아빠는 뜨끔하셨을 거다. 집을 뺏기기 싫어서건 손녀딸을 오래 지켜보고 싶어서건 아마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실 거 같다.
아이들의 언어를 보고 듣기 전까지는 남편의 언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말은 필시 나를 무시하거나 괴롭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언어 예절을 다 배우지 못한 아이들의 순수하고도 엉뚱하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말들을 보며 남편의 언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마 악의는 없었을 거다. 그저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 그렇다고 아이들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적어도 말로 다른 사람의 오해를 사거나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 할게 아닌가. 사회 구성원이 되는 데에도 예의 바른 화법은 중요한 요소가 될 거다. 나중에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말은 필요하니 꼭꼭 가르쳐줄 거다.
"미래의 사위 여러분. 제가 이렇게 평화주의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