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얼굴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닌 척 해도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피어난다. 고함량 비타민을 때려 넣어도 나올까 말까 한 컨디션이다.
드디어 곧 개학이다.
두 달을 꽉 채우고도 며칠을 더한 방학이었다. 여름방학은 훨씬 짧고 놀러 갈 데도 널렸는데 두 배나 긴 겨울방학은 갈 데가 없다. 무얼 하며 보내나? 하루 이틀은 다 같이 푹 쉬었고, 아이들 친구도 초대해서 놀게 했다. 마침 겨울이 생일인 둥이 생일파티도 하고 알차게 4박 5일 가족 여행도 다녀왔다.
한 달이 지나자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빈둥대는 게 주업인 막내는 입만 열면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했다. 눈만 마주치면 가위바위보 하나 빼기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는데 번번이 내가 졌다. 이기려고 노력해 봤는데도 졌다. (분하다.) 제발 가위바위보 그만하자고 하면 할리갈리 카드 게임을 들고 왔다. 몇 번 해주다가 지겨워서 도망 다녔더니 나중에는 막내 혼자서도 카드 게임을 했다. 순발력 게임을 북 치고 장구치고 혼자 하는데 놀랍도록 속도가 붙었다. 방학만 지나면 곧 카드게임 장인이 될 것 같았다. (그럴 정성으로 공부를 하면 좋으련만!)
더는 못 참겠다. 앞으로 심심하다고 하면 공부나 청소를 시키겠다고 엄포를 놨다. 식겁한 막내는 하루 이틀 소리 없이 방으로 숨어들더니 금방 두 손을 들고 기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일대일 밀착케어 시스템. 얘는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지 수시로 엄마를 불러댔다.
"엄마 베이킹 해도 돼요?" "엄마 요리 해 먹어도 돼요?" "엄마 만들기 해도 돼요?" "엄마 철판 아이스크림 해 먹어도 돼요?"
말하고 보니 죄다 만드는 것들 뿐이고, 이건 끝나고 나면 쓰레기와 설거지거리가 대량 생산된다는 뜻이다. 두 손을 묶어둘 수도 없고 난감했다. 가만히 얌전히 조용히 '앉아서' 놀 수는 없는 거니?
둥이도 손이 안 가는 건 아니다. 고학년이 되니 공부도 봐줘야 하고 수시로 학원 라이딩 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틈만 나면 수다를 떠는데 이게 압권이다. 말이 빠르고 설명이 장황하며 대화 주제가 수시로 바뀐다. 내가 궁금한 것은 A이냐 B이냐 인데, 얘네는 질문이 떨어졌다 하면 A에서 Z까지 다녀온다. 그러다 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도 까먹는다. 또 툭하면 셋이 싸우는데, 입담이 거세고 현란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밥은 또 왜 이렇게 잘 먹는지. 일어나면 "아침 뭐예요?" 오전 간식 먹고 나면 "점심 뭐예요?" 5시만 넘으면 "저녁 뭐예요?" 하... 행복하다 정말.
내 손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직접 만든 밥을 아기새처럼 받아먹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가슴 벅찬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한 일이 월화수목금금금 상태로 두 달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달이 지난 후부터 수혈처럼 마시는 커피의 양(그래봤자 디카페인)이 늘었다. 밤마다 쌓여가는 맥주캔 덕에 식도염도 생겼다. 잠깐이라도 나가서 운동하고 기분전환도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시간이 조각조각 갈라져 버린다. 운동이든 카페 나들이든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1시간 30분은 확보되어야 한다. 아이들 밥, 라이딩 시간에 맞추려면 내게 주어지는 시간은 보통 1시간 내외라 뭘 하기에도 애매했다. 운동과 독서를 메인으로 소중하게 지켜내던 나의 일상이 소리소문 없이 흩어져버렸다.
"벌써 3주밖에 안 남았다고?"
"아직 3주나 남았다고?"와 같은 대화를 한 열 번쯤 주고받았을까?
감옥의 죄수처럼 벽에 빗금을 치며 날수를 셀 필요도 없이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내 눈밑의 다크서클은 이제 곧 오고야 말 광명을 알려주는 성화나 다름없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개학)은 온다.
애들은 (학교에) 가라.
불행(방학) 끝 행복(개학) 시작이다.
엄마는 자유를(개학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