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nny Mar 30. 2020

땅꼬마의 염산과 김정은의 핵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은 상대방의 실체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80년대 초 학창 시절의 일이다. 어떤 땅꼬마 친구가 학교에 다닐 때마다 "염산 가방"을 들고 다녔다. 키가 아주 작고 마른 체형이었던 그의 "염산 가방"에는 해골 그림과 함께 염산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를 잘못 건드리면 가방에서 염산병을 꺼내서 상대방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그 누구도 땅꼬마 친구를 우습게 보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다가오면 모든 친구들이 그를 피해서 멀리 떨어지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의 "염산 가방"에 진짜 염산이 들었는지 확인했다거나, 그가 염산을 뿌리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땅꼬마가 들고 다녔던 염산 가방 @Dr Kenny


 

그의 "염산 가방"에 염산병이 있는지, 그가 화났을 때 상대방에게 염산을 진짜로 뿌리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그로부터 염산 테러를 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염산 가방"은 상대방에게는 위협 효과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남자만 있는 학교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한-그 땅꼬마 친구만의 "비밀 병기(secret weapon)"였던 것이다.




김정은의 “핵무장”은 땅꼬마 친구의 “염산 가방”과 매우 유사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의 핵 역량에 의구심을 표하지만, 수년 전 ICBM 화성 15형 시험발사를 통해 김정은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바가 있다. 북한 지도부가 핵 무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 급성장으로 남북 간의 체제 경쟁에서 북한이 뒤처지면서, 김일성은 "북한 정권의 존속을 위한 길은 오직 핵 무장"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조부 김일성의 유훈인 핵 무장 과업을 부친 김정일에 이어서 충실히 수행했고-마침내 핵 무력을 완성했다고 국제사회와 북한 인민을 향해 공표했던 것이다.


화성 15형 시험발사 @KBS News


최근 COVID-19 팬데믹으로 유엔 사무총장이 모든 국가 간의 분쟁을 중지하자고 촉구한 이후에도 북한은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였다. 잊힐 만하면 북한이 핵 실험을 하고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것은-김정은이 자기는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라는-서방세계를 향한 경고일 수도 있다.      

북한이 개발한 핵폭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핵탄두 운반수단인 미사일의 사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땅꼬마 친구의 "염산 가방"처럼-김정은의 "핵무장"은 우리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위협으로부터의 해방은 상대방의 실체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땅꼬마가 들고 다니던 "염산 가방"의 실체를 모른 채,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태도를 취했던 것은 위협에 대응하지 않고 회피하는 가장 소극적인 자세였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써, 그 가방을 강압적으로 또는 몰래 열어 보던지, 차라리 그처럼 염산병을 가방에 넣고 다니던지 했더라면, 그 땅꼬마 친구의 실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염산테러"의 위협을 염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정은의 "핵무장"에 대한 우리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 김정은 정권에 대해서 그 실체를 잘 알지 못한다. 북핵에 상응하는 핵무기도 우리에겐 없고,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북한과 김정은 정권의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거나, 북핵 공격 억제(deterrence)를 위한 제2격(Second Strike)의 핵 역량(capability)을 보유하게 된다면 북한의 위협(threat)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핵무기 보유는 국제 사회의 각종 규범과 지역 안보 및 동맹관계, 핵 보유국으로부터의 기술 이전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난제를 해결해야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분단 상황 하에서 북한과 김정은 정권의 실체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북한에 대해서 나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듣거나, 그의 책을 읽고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단, 그 실체를 알려주는 이가 남과 북 양측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야만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오랫동안 한국학을 연구하고 북한에 여러 차례 방문하였으며 북한 체류 경험이 있는 외국 국제정치학자가 있다.

그는 영국 런던 SOAS 한국학 연구센터 연구교수, 센트럴 랭커셔대학 한국학 국제 연구소장을 지냈다. 1998년에서 2000년 사이에는 세계 식량계획과 유엔 아동기금 업무를 맡아 2년가량 북한에 체류하면서 세계 식량계획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식량 원조 사업을 감독했다. 헤이즐 스미스(Hazel Smith)가 바로 그 인물이다. 저서로는 North Korea in the New Order(1996), Hungry for peace(2005), North Korea: Markets and Military Rule(2015)이 있다. 이 중에서 세 번째 책이 "장마당과 선군정치(2017)”라는 제목의 국내 번역서로 출간되었다.




헤이즐 스미스는 20년간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북한을 탐구하기 위해 사회과학의 방법론과 역사적 설명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북한에 체류하며 일했던 2년, 일본에서의 2년, 미국에서의 근 5년, 여러 차례의 중국과 남한 방문 등을 포함해 약 20년에 걸쳐 최고위급 정치인들로부터 북한의 가장 외딴 지역에 사는 극빈층 가족까지, 이 국가를 망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북한 사회와 정권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추적해, 가능한 일의 범위와 한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얼마나 왜곡된 시각으로 북한을 바라보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북한을 조금 더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다음은 장마당과 선군정치에서 부분 발췌한 내용이다.

"북한의 기이함이라는 신화를 영속화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곳은 다름 아닌 북한 정권이다. 군사적 우월성, 무시무시함, 예측 불가능함이라는 신화는 적들을 설득시켜, 그들에게 북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북한은 유별나게 불가사의하다는 상식화된 가정은, 북한 정권의 취약성과 약점과 단점을 드러내는, 더 냉철한 분석을 가로막는다(40쪽)."     
이전 01화 군사분계선은 어디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