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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Mar 06. 2021

우리 시대의 '카르페 디엠'은 어떤 의미인가 II

고대 로마, 중세 말, 그리고 20세기의 ‘까르페 디엠’을 반추해 보며

라틴어인 ‘까르페 디엠(Carpe diem)’은 영어로 ‘Seize the day’ 또는 ‘Pluck the day,’ 한글로는 ‘현재를 잡아라’ 또는 ‘현재를 즐겨라’로 번역할 수 있다. ‘까르페 디엠’이란 말은 고대 로마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시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여러 차례의 전쟁에 시달렸던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자, ‘이젠 마음 편하게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살자’라는 의미로 호라티우스가 카르페 디엠을 사용했다. 중세 말기 유럽의 카르페 디엠은 인사말이었다. 당시 흑사병이 유행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시절엔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까르페 디엠’이라고 인사하면서 서로를 격려했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의미였다. 20세기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에 까르페 디엠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배역을 맡은 주인공 존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한 명대사로 기억되고 있다. 키팅 선생은 제자들에게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카르페 디엠’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는 ‘까르페 디엠’을 어떤 의미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대 로마 시대, 카르페 디엠이라는 인사말이 유행했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에게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Gaius Julius Caesar)라는 조카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주길 원했지만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다른 두 인물과 함께 로마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삶이 궁핍해진 백성들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독점할 기회가 생겼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의 대결에서 전승을 거두고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드디어 로마의 평화 시대가 문을 열었다.     


로마제국의 평화 시대를 맞아 호라티우스가 ‘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을 시에 사용했다. 오랜 세월 전쟁으로 인해 슬픔과 공포에 휩싸였던 로마인들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여러분은 이젠 마음 놓고 편히 쉬어도 됩니다’라고.


까르페 디엠이란 말로 로마인들을 위로했던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황제가 자신의 부관이 되어달라고 호라티우스에게 요청했지만, 그는 황제의 청을 거절하고 평생 자기만의 삶을 즐겼다. 그 이후로부터 로마인들이 까르페 디엠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마음 편하게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살자’라는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의 의미를 아주 오랫동안 되새겼다고 한다.     


중세 말기의 까르페 디엠은, 지금의 코로나-19 팬데믹처럼, 흑사병 대유행으로 수많은 유럽인이 죽어가던 시절의 인사말이었다. 흑사병 감염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의 생애 마지막 날이 오늘일지 내일이 될지 모르던 시절,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시오’라는 의미로 한 마디씩 건네던 인사말이 까르페 디엠이다.


흉작과 기근으로 흑사병 전염 속도가 더 가속화되었다. 유럽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2천5백만여 명이 사망했다. 흑사병 대유행으로 인한 유럽 인구와 노동력의 감소가 영주의 권력을 약화했고, 부가적인 요인과 결합하여 봉건제도는 해체되고 절대왕정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20세기 말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까르페 디엠’이라는 말을 가르치면서 유행어가 되었다. 키팅은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하는 의미로 까르페 디엠을 사용했다. 일류대학 진학과 고상한 직업 취업을 위해 현재 학창 시절의 낭만과 즐거움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학생들에게 지금 사는 이 순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순간임을 일깨워 준 교훈이다.


1989년 상영된 이 영화의 배경은 졸업생 70%를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시키는 130년 전통의 명문 사립학교 웰튼 아카데미다. 이 학교는 전통, 명예, 규율, 우수함이라는 4가지 원칙에 따라 오늘을 희생해서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미래에 은행장, 의사, 변호사라는 좋은 직업을 얻으라는 식의 교육을 해 왔다. 즉, 지금은 학교에서 부여하는 획일적인 교육과 몰개성적인 생활을 받아들이고, 명문대학에 진학한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라는 식이다. 하지만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것과 너의 개성과 정체성을 찾아라”라고 가르친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Carpe diem). 삶의 정수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다. 우린 언젠가 죽으니까! 한 번뿐인 인생, 독창적인 삶을 살아라! 너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고 노력해라. 늦어질수록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진다. 타인의 인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자기 신념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 자기 나름의 길을 걸어라. 방향과 방법은 마음대로 선택해라. 그것이 자랑스럽던, 바보스럽던 걸어가라. 네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너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하는 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즐기라는 의미라기보단 ‘지금의 너 자신을 찾으라’였다. 호라티우스의 까르페 디엠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 시대를 맞이한 백성들에게 이젠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의미였다. 중세 말의 까르페 디엠은 흑사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이들에게 인생의 마지막 날을 의미 있게 보내라는 인사말이었다. 20세기 말에는 학생들에게 전통과 규율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를 추구하라는 도전 의식을 심어주는 말이 까르페 디엠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는 카르페 디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문득 이어령 교수의 ‘눈물 한 방울’이 떠올랐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해 온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가 서울대 명예교수인 김병종 화가와 신년 특별대담을 나누면서 했던 얘기다. 일간지에 실린 눈물 한 방울에 관한 이어령의 구어체 이야기를 문어체로 바꾸어 가면서 글감 노트에 만년필로 필사했다. 글감 노트를 꺼내 다시 읽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가 사는 현대의 카르페 디엠은 지금 바로 이 순간, 타인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것이 아닐까? 카르페 디엠과 눈물 한 방울을 잇는 영감을 준 이어령 교수의 대담을 소개하면서, 21세기 카르페 디엠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독자 여러분의 창의적 상상력에 맡기려 한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땀은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이룬 산업화의 뜻이고, 피는 억압에서 풀려난 민주화의 상징이다. 피와 땀이 하나가 돼야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汗血馬)처럼 힘을 낼 수 있는데, 현실은 반대로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거기에 코로나바이러스가 덮쳐 인간관계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가 되게 했던 프랑스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rnity, 박애),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닐까?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가는 세상 말이다.


“사내자식이 왜 울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우리에게 눈물 타령은 여전히 창피하고 나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적석천(水滴石穿),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도 있고, 회초리보다 무서운 것이 엄마의 눈물이라는 말도 있다. 한국만이 아니다. 사랑의 눈물 한 방울이 마법에 걸린 왕자를 주술에서 풀려나게 했다는 서양 동화도 있다.     


김병종 화가의 ‘바보 예수’라는 그림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세속적인 시각에서 보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 떼를 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구하려는 것은 바보만이 할 수 있는 셈법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멸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흘렸던 예수의 눈물, 안회(顔回)의 죽음과 골짜기에 외롭게 피어있는 난초 한 그루를 보고 탄식한 공자의 눈물, 길거리에서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흘린 석가모니의 눈물. 우리는, 아니 세계는 그러한 눈물이 말라버린 사막에서, 무인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한(恨)을 기층문화로 살아온 것이 한국문화였다. 먹을 것은 없어도 인정의 눈물만은 ‘눈물보’에 가득 차 있었다. 실학자인 연암도 슬플 때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칠정(七情)이 사무칠 때 생겨나는 것이 울음이고 눈물이라고 했다. 희(喜), 로(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칠정’이 ‘칠색’으로 나타난 것이 눈물의 다양한 무지개색이었다. 피는 못 속이는지, 눈물을 안습(眼濕)이라 부르는 요즘 젊은 세대들도 ‘감동을 먹었다’라고 한다. 눈물 기근에 굶주린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를 휩쓴 노래 중에도 ‘피 땀 눈물’이 있다. 노랫말을 보면 ‘한오백년’의 민요나 왕년의 트로트에서 한 세기 진화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여당에는 이성(理性)이 없고 야당에는 야성(野性)이 없다고들 하지만) 정작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인성(人性)의 눈물이다. 코끼리나 낙타도 눈물을 흘린다고는 하지만 이 지상에서 실제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지능이나 체력이 인간보다 월등한 AI 슈퍼 로봇도 눈물만은 흘릴 줄 모른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건 슬퍼서도 괴로워서도 아니다.) 우리가 짐승 또는 기계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인간임을 증명하고 선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타인을 위한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라는 대중가요가 있지만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기도 한 것이다.


* 담당기자로부터 편집 초안을 받았을 때 (    ) 괄호 안의 내용이 삭제되고 "그런데"로 바뀌어 있었다. 정부 부처의 지원을 받는 월간지의 성격상 여당, 야당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하고 편집부의 수정을 그대로 수용했다.


Carpe diem!

흑사병으로 죽어가던 고대 유럽인들이 서로 격려하며 인사말로 사용하고, 전쟁에 시달렸던 중세 로마인들에게는 위로를 주었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했던 20세기의 학생들에게는 자기 정체성을 찾게 해 주었던 말이다. 2021년 또다시 새봄이 찾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묵묵히 인내해 온 독자들에게 이젠 타인을 위한 박애와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을 흘려보길 권한다.


“까르페 디엠! 눈물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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