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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유 May 12. 2024

목적의 난민

‘진우’ 이야기

 아침 6시 30분, 알람이 울린다.

곤히 잠이든 아이와 아내가 혹시나 인기척에 깰까 알람을 바로 끄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간다.

아침은 근 1년 간 유지하고 있는 루틴으로 자동비행모드인듯 습관에 따라 움직인다.


 유산균 1포를 따뜻한 물과 함께 마시고, 전날 준비해 둔 나이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아파트 헬스장으로 향한다. 초반 30분은 근력운동-나머지 30분은 유산소 운동, 한바탕 뛰고 나면 온몸에 땀이 흥건해지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배어난다.


 올해 서른여덟, 진우는 겉으로 보기엔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S전자에 취직했고, 서른둘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고 3살짜리 딸아이도 두었다. 운 좋게 부동산 침체기이던 16년에 동탄 아파트 청약 당첨도 된 그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행복 그 자체다.


 그런 진우가 올해로 정신과를 다닌 지 3년이 됐다.

정신의학과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깨달은 건 진우 내면에 ‘상대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과도하게 크다는 거다.

 어릴 적, 진우의 부모는 그에게 기대가 컸다. 부모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기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당연히 서울대를 갈 거라 생각했다. 보통 부모 같으면 모의고사에서 수학 한 문제만 틀렸다면 잘한다고 칭찬세례를 퍼부었을 텐데.. 그런 날이 진우에게 벌어지면 엄마는 무표정으로 “오답 노트 작성해 와”라고만 말했다. 엄마의 표정이 밝아질 땐 오답이 없거나 (그럴 일이 많진 않았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어려운 문제를 틀렸을 때였다.


 그랬던 진우는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다. 쌀쌀했던 집안 공기가 회복된 건 그로부터 3년이 지난, 그가 군대를 다녀온 이후였다. 이때 난생처음 연애도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 썸을 타서 몇 번 만나본 여성이 있긴 했었지만 진우가 먼저 대시하고 정식으로 사귀게 된 건 수정이 처음이었다.

수정과 함께하는 모든 게 진우에게는 새로웠다. 교복을 입고 놀이공원에 가서 스티커 사진을 찍어 본 것도, 여자친구를 집에다 데려다 주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밤 새 통화한 것도,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라고 고백한 사람도.

 이때야 말로 진우는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정이 노량진으로 떠나게 되면서, 그 역시 취업 준비를 하면서부터 그 좋았던 순간은 기억의 습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수정과 이별 후 진우의 회사생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신입사원 연수 후 해외 영업 부서에 배치되었지만 다른 직원들에 비해 영어 실력이 모자랐다. 영어회화 새벽반을 등록하고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 노력도 했지만, 서른 가까이 되어 영어를 아침 1시간 공부한다고 눈에 보이게 영어가 술술 나올 턱이 있으랴. 주변에서는 신입사원의 부서배치가 잘못됐다며 수근덕거리기 시작했고, 팀장은 진우의 부서 이동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모든 사람에게 맞춰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영어 실력이 모자란 신입사원이 아니라 넉살 좋고 성격 좋은 신입사원이라는 평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문제의 상황엔 늘 진우가 함께 했고, 진우가 등장하면 냉랭했던 회의 분위기도 유머로 넘쳐났다.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기보단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게 되었고, 굳이 동의하지 않는 일도 갈등을 피하고자 억지로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자 정말 다들 고생 많았어요. 신사업추진 1팀 때문에 우리 부서가 올해도 성과 1등을 차지했어요! 내년도 잘 부탁합니다. 다 같이 한 잔 합시다!" (함성)

평소엔 독사 같은 피드백을 쏘아대던 박상무도 연말 성과 1등이 되자, 1년 계약이 연장될 거 같은 안도감을 느끼자 사뭇 사람 좋은 표정으로 술을 권한다.

"상무님, 이번에 저희 팀에서 진우 과장이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저번 스마트 X 프로젝트 있죠? 그거 진우 과장이 기획부터 수주까지 총괄했던 작품입니다." 서 팀장이 진우의 공을 치하하며 박상무에게 어필을 해준다.


"진우 과장, 혹시 올해로 과장 몇 연차지?" 박상무가 진우를 바라보며 얘기한다.

"아 네 상무님, 올해로 3년 차입니다" 진우가 부끄러운 듯 얘기한다.  

"상무님, 이 친구가 작년에는 ST 프로젝트 있잖아요, 그때 기획도 이 친구가 했었어요. 저희 팀에 보물입니다.(하하)“ 그런 서 팀장의 칭찬에 진우는 1년 간 자신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들어가는 알코올에 힘을 빌어 서로가 서로에게 공을 돌리며 아름다운 송년회가 마무리가 된다.


3차까지 서팀장과 찐하게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왠지 모른 공허함이 몰려온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분명 작년 송년회도 이런 분위기였다. 그땐 ST 프로젝트가 성공했고, 박상무의 자리에 지금은 회사를 떠난 김상무가 있었다.

작년도 올해도 진우는 최선을 다했고, 운도 좋아 성과도 있었다. 그로 인해 인사고과도 좋게 받았다. 지금까지는 어려움과 고생도 인사고과를 잘 받거나, 주변에서 인정해 주면 모든 게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뭐?!"

매년 반복되는 이 일이 이젠 새롭지도, 처음 받았던 그 성취감만큼의 도파민이 분출되지도 않는다.

"난 도대체 지금까지 무얼 한 걸까?" 남들에게 맞춰주는 삶을 사느라,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목적인지도 모르고 살았다는 현타가 훅 올라온다. 이른바 목적의 '난민'.

진우는 이제는 엄마로부터 벗어나 성장했다고 느꼈던 자기 자신이, 사실은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자괴감이 든댜.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린다. 아내의 카톡 메시지다.

"퇴근 후 분리수거하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화장실 청소하기. 오늘 안 하면 안 돼! 퇴근하면 오늘 꼭 해요! 그리고 내일 담보대출 이자 내는 날이야~"

진우가 삶의 목적이라는 깊은 고민에 빠져드려는 찰나, 아내의 체크리스트가 그에게 말한다.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현실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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