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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유 May 09. 2024

나는 솔로

'수정' 이야기

바야흐로 OTT 전성시대에도 불구하고

수정이 꼭 TV를 켜고 본방을 사수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매주 수요일 밤 10시 30분 <나는 솔로>


(배경음 - 콰켄안 레스티 티안 솔로~ 콰켄안 레스티 티안 솔로 , 솔로 솔로)


익숙한 배경음이 울리면 맥주 한 캔을 쥐어들고 미니멀 라이프를 위해 구매한 카레클린트 소파와 물아일체가 된다.


[아,, 이번 남자 출연자들 훈훈한데.. 한 번 신청해 볼 걸 그랬나?]


올해로 서른여섯, 그녀는 솔로다. 그렇다고 해서 모솔특집에 나오는 연애 한 번도 못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유형은 아니다. 서른이 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결혼을 못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어. 쩌. 다. 보니 그렇게 됐다.

 


20대 때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애썼고, 30대에는 커리어에 좀 더 신경을 쓰다보니 자연스레 결혼이 후순위가 되었다.

20대에 그녀는 노량진 고시원 생활을 4년 간 했다. 첫 3년은 7급 시험 준비를, 마지막엔 눈을 낮춰 9급 시험을 치렀지만 결국 떨어졌다.

요즘엔 임금 인플레로 인해 공무원 인기가 폭삭 사그라들었다지만, 수정이 시험을 준비하던 13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공무원 열풍이 불었다.


딱히 공직에 꿈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공무원이기도 했고. 마땅히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도 뚜렷하지 않았다.

“넌 성향 상 공무원이 맞아”라는 엄마의 말에 어릴 적부터 할 거 없음 공무원 하면 되겠지라고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수정이 3년 간 노량진이라는, 사회와는 격리된 공간에서 외로운 생활을 이어나가던 시기. 대학 동기들의 취업 소식이 하나 둘 들려왔다.

페이스북이 대세이던 때, 친구들의 프로필에는 직장 경력이 추가됐고, 신입사원 연수 사진이 피드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정도 축하 댓글을 달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선뜻 글을 적기가 머뭇거려졌다.

“축하 고마워 수정아, 잘 지내지?”라는 대댓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금씩 결과물을 이뤄내는 주변사람들을 보며 점차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건 남자친구 진우였다. 진우는 수정의 대학교 2년 선배다. 진우가 군을 갓 제대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불태우던 그 시기에 둘은 만남을 시작했다.


만난 지 1년이 되던 해 수정은 노량진으로 떠났고 진우는 복학해 대학생활을 이어나갔다.

어느덧 수정이 세 번째 시험에 떨어지던 해, 진우는 굴지의 대기업 S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그렇게 진우와 사귄 지 4년째 되던 해, 진우가 회사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되던 날 이별하게 된다.

큰 다툼이 있던 건 아니었다. 진우는 회사생활이 적응이 힘들지만 고시 준비를 하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온전한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고, 수정도 그의 마음을 세심하게 알아채고 토닥여줄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속마음을 털어내지 못하다 보니 오해가 쌓이기 시작했고 나중엔 만나서 할 얘기가 없었다.

‘4년의 만남이 끝나는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이별 1년 후 수정은 노량진 생활을 청산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현실을 냉혹했다. 서류지원만 15군데 제출했는데 한 곳도 통과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합격한 곳이 OO협회였다. 규모는 작지만 안정성을 생각했을 때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첫 출근 날, 팀장님은 사내 공지 매뉴얼을 읊듯이 그녀에게 말한다.


 “수정 씨, 여기 입사한 거 행운이야. 여기 여자직원들 출산휴가도 자유롭고, 본인만 마음이 있으면 정년까지도 다닐 수 있어”


그때 알았다. 엄마가 말한 공무원 성향 따위는 그녀의 DNA에 없다는 걸. 입사 후 6개월도 되지 않아 이 회사와 본인은 맞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단, 마케팅이라는 직무는 마음에 들었다.

마케팅 직무로 이직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퇴근 후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3개월에 100만 원이 훌쩍 넘었지만 괜찮았다. 강의 구성은 알찼다. 실무에서 필요한 퍼포먼스 마케팅/그로스 해킹들의 지식은 물론 셀프브랜딩까지!


4년의 허비한 시간을 어떻게든 보상받으려는 마음으로 무섭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진우보다 잘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그녀 삶에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1년 후 수정은 이커머스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된다. 지금은 새벽배송으로 유명해진 이 회사에 초기 멤버로 들어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순진하게 고시공부만 하던 시절의 수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디렉터 최수정이라는 직함이 그녀를 따라다닌다.


커리어에서 폭풍 성장을 하던 시기에도 수정은 꾸준히 연애를 해왔다. 하지만 연애는 쉽게 시작해도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처음 만남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남자들이 좋다고 따라다니다가도, 바쁜 수정의 라이프스타일을 끝내 견뎌내지를 못했다. 수정의 성격을 받아주며 오랫동안 기다려준 건 진우가 지금껏 유일했다.

오늘도 <나는 솔로>를 보며 수정은 카레클린트 소파와 한 몸이 되며 잠깐 진우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본다. "뭐 잘 먹고 잘 살겠지..." 진우를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웃기는지 맥주 한 캔을 원샷해 버린다.


침대에 누워 인스타 쇼츠를 보다 우연히 친구 추천 항목에 낯익은 남자 얼굴이 보인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진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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