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어느 날 아침, 잘 자고 일어난 1호 꼬마의 눈이 살짝 부었다. 심하진 않아서 일단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하원 할 때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갈수록 붓기가 심해지길래 밤늦게 어린이 병원에 갔더니, 다래끼가 아닌 알러지성 결막염이라고 했다. 바이러스성 결막염이 아니라 어린이집에 가도 괜찮지만, 아이의 퉁퉁 부은 눈을 보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래도 안과에서 한 번 더 정확하게 진단을 받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1호 꼬마와 단둘이 안과를 찾았다. 다행히 안과에서도 어제와 같은 알러지성 결막염 진단을 받았고, 병원에서는 안약과 안연고를 추가로 처방해줬다. 병원 진료라는 큰 과제를 해결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 다 됐다. 이제부터 2호 꼬마의 하원 전까지는 둘만의 데이트 시간이었다. 일단 근처 레스토랑에서 아이가 먹고 싶다는 흑돼지 돈가스와 애플망고 에이드를 주문해서 함께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둘을 데리고 나왔을 때와는 달리, 점심 먹는 내내 모든 것이 수월하게 느껴졌다. 오롯이 한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흘리지 않고 먹자', '장난 그만!', '빨리 먹어!' 같은 명령어 대신,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말들이 오갔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슬쩍, 동생이 잘못해도 맨날 자기가 혼나서 속상했다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첫째의 애환이 느껴져서 마음이 짠했다.
늘 억울한 첫째 마음 공감하기
두 살 터울인 1호 꼬마와 2호 꼬마는 집에서 정말 자주 싸운다. 주로 2호가 먼저 도발을 하면, 1호가 참다 참다가 폭발해서 한 대 때린다. 그러면 2호가 울기 시작하고, 그때 부모가 상황을 인지한다. 일단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먼저 도발한 2호에게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해선 안돼', 1호에게는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돼'라고 훈육하면 사태는 일단락된다.
그런데 1호 꼬마가 느끼기에는 '동생이 화나게 해서 때린 건데, 또 나만 혼나네' 싶었던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너도 잘못했으니까 혼나는 거지' 하고 넘어갔을 텐데, 둘만의 데이트 시간에는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먼저 아이의 속상한 마음을 공감해주고, 아이의 이야기도 충분히 더 들어줬다.
엄마와 둘만의 시간이 아이에겐 어떤 의미일까. 1호 꼬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엄마랑 둘이 데이트해서 너무 좋았다며 방긋 웃었다. 육아 선배들이 종종 첫째 데리고 둘만의 데이트를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해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둘이 데이트하기로 1호 꼬마랑 약속했다. 물론 2호가 알면 속상하니까, 둘이 데이트는 우리만의 비밀인 걸로.
'엄마와 미술놀이'
1호 꼬마와 첫 둘이 데이트 이후로, 우리는 종종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의 속마음을 모를 때가 많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좀 더 편안하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참에 '엄마와 미술놀이'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엄마가 수업을 통해서 먼저 미술놀이를 경험해보고,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실습(?)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주 수업을 듣기 위해 서귀포까지 가야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첫 수업의 주제는 '갖고 싶은 것과 버리고 싶은 것 그리기'였다. 둘이서 집 앞에 있는 카페에 가서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술놀이를 시작했다. 먼저 1호 꼬마에게 갖고 싶은 것 세 가지와 버리고 싶은 것 세 가지가 무엇인지 물었다. 갖고 싶은 건 헬로카봇 장난감과 빙수, 그리고 나쁜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한 번개 파워였다.
그림으로 대화하기
그리고 버리고 싶은 건 예상대로 2호 꼬마, 그다음은 뜻밖에도 엄마, 아빠였다. 온 가족을 버리고 싶은 이유는 맨날 혼나는 게 싫기 때문이란다. 가족을 버리고 싶다는 애들이 있단 얘긴 선생님이 미리 해주셨지만, 내 자식이 그럴 줄은 몰랐기 때문에 좀 놀라긴 했다. 그래도 최대한 침착하게 갖고 싶은 것들을 먼저 그렸다. 그다음 버리고 싶은 걸 그려야 할 차례가 되자, 아이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사실 동생도, 엄마도, 아빠도 안 버리고 싶다고 말하길래 또 짠한 마음이 밀려와서 꼭 안아서 달래줬다. 엄마는 네 마음 이해한다고, 괜찮다고 하니까 갑자기 '나는 엄마 사랑해' 하면서 펑펑 울어버렸다. 죄책감을 느꼈던 걸까 싶기도 하다. 결국 버리고 싶은 것은 선인장밖에 생각해내지 못하고, 첫 번째 미술 놀이시간은 끝났다.
선생님께서는 내 후기를 보시더니 아이들이 자기 속마음을 부모에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건강한 거라고, 잘 성장하고 있다고 피드백해주셨다. 아이가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구나, 부모에게 혼나는 게 싫구나 정도로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비록 버림 당할 뻔(?)했지만, 오랜만에 1호 꼬마랑 단둘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시간들이 꾸준히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아이가 좀 더 편안하게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