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입을 옷이 없는 이유와 정체성
이 책은 내향적이고, 숫기가 없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내면의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내게는 거의 보물과 같은 책이다. 번역자에 따르면 캐럴라인 냅은 생전에 세 권의 책과 사후에 두 권의 책, 이게 전부라고 한다. 모든 글은 회고록의 성격을 띠는 에세이이고. 나는 이 책에 실린 역자의 글마저, ‘아 역시 어딘가 결이 비슷한 사람의 글은 참 편안하게 공감이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래 옮긴 문장은 역자의 글이다.
"냅의 글은 늘 변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과거의 악습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이야기, 느닷없이 닥친 상실이나 깨달음을 수용하려고 애쓴 이야기였다. 단순히 중독을 극복한 성공담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조금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지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점점 더 편안한 (더 자유로고, 더 즐겁고, 더 자신다운)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증언하는 글이었다."(명랑한 은둔자, 옮긴이의 말, 김명남)
"냅이 3,40대에 쓴 글에서 내가 내 3,40대의 주제들을 발견하고 변화의 단초와 공감의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냅이 5,60대에 쓴 글이 있었다면 나는 그 글에 내 5,60대의 삶을 포개어 또 무언가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없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이 글들을 하릴없이 다시 뒤적일 뿐이다."(명랑한 은둔자, 옮긴이의 말, 김명남)
나도 이제 40대가 되었다. 역자의 말처럼 나 역시 냅의 글에서 내 40대의 주제들을 발견한다.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맞아 맞아,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달라질 수 있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점점 더 나다운 내가 될 수 있어. 그럴수록 나는 더 자유롭고 더 즐거울 수 있다고 정말 큰 위안을 얻게 된다.
나와 애초에 너무 다른 성향, 너무 다른 스타일의 삶을 사는 인물을 보면서 내가 감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주제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다 발견하더라도 애초에 구조가 다르니 적용은 더더욱 어렵고. 반면 아주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에서 엿보이는 비슷한 점들, 비슷한 사고의 흐름이 느껴지는 인물에게서는 그 시행착오를 통해 내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좋은 어떤 것들을 확실히 얻게 된다.
내게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 피나 수혈할 수는 없는 것처럼, 반드시 혈액형이 맞는 피를 수혈하는 것처럼 말이다. 육아를 하면서 커피 수혈이라는 말에 꽤나 공감을 하게 되는데, 인생을 두고 보면 책 수혈이라고 해야 할까 닮은 구석이 있는 결을 가진 사람의 글에서 시절마다 배우는 것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것이다.
특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생각이 다수 쪽이기보다는 소수 쪽이라고 느껴질 때 그러니까 나 자신이 뭔가 대세의 커다란 흐름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거기에는 내 자리가 없다고 느껴져서 이거 내가 문제인가? 싶을 때, 비슷한 걸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치열하게 모색한 사람의 솔직한 글만큼 힘이 되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상처와 실패, 결함에 대한 이 책의 솔직함과 거기서부터 나오는 세련된 유머는 대단하다. (특히 찌질하고 구린) 내면의 어떤 상태를 이렇게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처음 읽을 때 거의 모든 문장이 밑줄 치고 싶을 만큼 공감이 갔다. 지금은 이 글을 작성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내 주요 이슈와 겹치는 부분이 눈에 더 들어온다.
가족 및 친구들과 떨어져 지방에서 두 돌 아기를 가정보육하면서 보내는 하루는 비교적 고요하다. 이런저런 만남으로 어떤 날은 좀 더 시끌벅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조용한 편에 가깝다. 나는 친밀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대단히 즐기고 좋아하지만, 그 훨씬 이상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다. 그리고 일말의 불안감 없이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다.
내게 교유는 얼마큼 필요한지, 혼자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필요한지 보다 디테일한 감각을 익히고 있는 중이다. 그 어떤 지점을 찾아냈을 때 이를 삶에 보다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그녀의 표현대로 '가공할 만한 작업이고, 종종 평생 추구해야만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그것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깊이 이해하고 선택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자신에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즐긴다는 사실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그 시간에서 공허함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능력도 더 기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고립의 차이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pp.18-19)
"(..) 작가 캐럴린 하일브런은 자신이 삶에서 달성하고자 평생 애써온 이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사적인 공간이 충분하되 지속적인 교유가 있는'상태다. 하일브런에게 사적인 공간은 시골의 작은 집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고, 교유는 가족과 소규모의 친한 친구들로 충족되었다.(..) 자신에게는 시골의 작은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집을 찾아내는 일, 또한 공감해주는 남편과 친밀한 친구들과 심장과 영혼을 모두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는 일, 이것은 가공할 만한 작업이고, 종종 평생 추구해야만 하는 작업이며, 하일브런도 60세를 훌쩍 넘기고서야 비로소 적절한 균형을, 혼자 있는 시간과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 적절한 혼합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사적인 문제다(p.23)"
나는 어릴 때부터 낯을 많이 가리고, 낯선 환경에 겁을 먹었다. 내향적인 기질이 있었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내향성은 '외향적이고, 사교적이고, 적극적인'것을 추구하는 부모님과 사회의 바람에 밀려 '어딘가 부족하고 못난 것'이 되어 버렸었다. 늘 외향적이고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며 살아왔는데(연기에 몰입하다 보니 긴 세월 나 자신도 속고 살았지만 사실 그 모습으로 가만있기만 해도 큰 에너지가 소모됐다.), 그런 연기를 더 이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나를 두니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라 이제야 비로소 편안하다.
나는 우리 아이의 낯가림과 수줍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 한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수줍음이라는 곱고 보드라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아이가 내 눈에는 참 매력적이다. 조심스레 응원하는 마음, 약간의 기다림이 좀 더 필요할 뿐이다.
"나는 우리 문화가 수줍음에 곧잘 동반되는 예민한 감수성을 인정하고 높이 사는 문화이기를 바란다. 사교적이고 자신만만한 성격에만 지속적으로 보상하는 문화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p.37)
자신의 실패나 실수, 상처에 대해 이토록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솔직함도 능력이다. 자신의 상태나 마음, 생각을 명료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아래 인용한 문장들을 보며 정말 내 마음속에 누가 들어갔다 나온 줄 알았다. 스스로 속 시원하게 언어화할 수 없던 것들이 언어화된 것을 마주 할 때의 그 찌르르한 느낌이란! 그녀의 예리한 통찰력, 그리고 관찰력 덕분에 나 자신을 한층 더 섬세한 층위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밑바탕에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고,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내게 맞는 남자나 직업이나 신발, 옷, 헤어스타일 따위가 휙 하고 나타나서 나를 바꿔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행복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외부에서 내게 주입해주기를 기다렸다"(p.155)
"예뻤고, 인기가 좋았고, 성적이 올 에이였고, 학업 우수상을 많이 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내게 생기는 좋은 일들은 모두 외부적 요인의 산물이라고-우연이거나, 남들이 잘못 판단한 것이거나, '행운'이거나-여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다."(p.160)
"내 경우에 이 공허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거나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나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할 일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pp.186-187)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실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 (p.192)
"시행착오와 데이터 수집. 이것은 수고가 들고 힘든 일이다.(..) 너무 사소한 발견들이 아닌가 싶겠지만(실제로 사소하다), 그래도 이런 교훈들은 주야장천 술만 마실 때는 배울 수 없고 우리가 견고한 자아 감각을 구축하려면 꼭 필요한 작은 벽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 욕구는 이것이야, 내 특별한 강점과 약점은 이것이야, 하는."(p.198)
"내가 베티처럼 솔직하지 못하고, 걱정이 지나치고, 자존심이 결여된 반응이 내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 앉았던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일일이 셀 수 없을 지경이다"(p.243)
"우리는 일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직장에서 자기주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는 올바른 말만 해야 한다고 걱정해서, 안전한 주제에 대해서만 말한다. 가령 일이라거나."(p.253)
옷에 대한 이야기는 브런치 글에도 2개 정도 있다. 하나는 미혼 시절의 상징과 같은 원피스를 처분한 일, 다른 하나는 체중관리의 한 방법으로서의 옷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맞이하게 된 패션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신발'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 발의 편안함, 가벼움 등을 고려하여 신발을 선택하다 보면 그에 따라 옷 스타일도 같이 변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지난 1년 간 몸무게의 변화가 10kg 이상이다 보니 작년에 구입했던 옷들이 지금은 커져 버려 핏이 어벙벙해지고 불편하다. 체중이 5kg 정도 감량되었을 때 입었던 옷들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 옷들도 뭔가 오묘하게 현재 몸의 단점을 부각하고, 장점은 가린다.
옷을 구입했던 관점도 지금과는 다르다 보니 올해 옷을 새로 꽤나 구입하게 되었다. 이 몸무게 + 주로 아이와 함께 다니는 생활 + 생활에 대한 지금의 내 관점에 맞는 옷을 찾는 건 나도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이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그 와중에 성공적이어서 꼭 맞는 옷(적당히 핏 하고 적당히 편안한)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기분이 좋다. 옷도 몸에 편안하게 맞고 시각적으로도 거슬리는 게 없어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스타일에 대해 혼자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듭해 오고 있을 때 아래 글을 다시 읽다 혼자 크크큭 웃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과 옷장에 입을 옷이 없는 것의 관계는 유행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평소에 유행하는 옷을 자주 입는 편은 아니다 보니), 그게 바로 아래 내용이기도 하고 서술하는 태도마저 너무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내 옷장은 완전히 낡은 무언가로 느껴진다. 완전히 옛말이 되어버린 서너 가지 버전의 나를 대변하는 옷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현재 내가 느끼는 나와도 맞지 않는 옷이다. (..) 미니스커트도 10벌 있다. '나는 정말 초라한 인간인 것 같지만 그래도 다리는 예쁘니까' 시절에 입었던 옷들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바깥으로 드러난 모습이 내 내면을 어떻게 반영할까? (...)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견고한 내면의 평안을 찾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서 그러기도 하다. (..) 새 옷과 화장품을 사는 데 한 밑천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라고, 두 가지가 발맞추어 가도록 하려는 시도라고, 친구는 말했다. 이것은 평생에 걸치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블루밍데일이 있는 게 그 때문이다.(pp.303-307)
이렇게 생기와 위트가 넘치는 보물 같은 책의 주제를 (아무도 물어보진 않았지만) 단 하나로 꼽자면 난 아래 문장인 것 같다.
"쉬고 싶은 마음, 당신이 아닌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 치기를 그만두고(이 대목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냥 당신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다."(p. 285)
냅의 '변화'는 다른 사람이길 그만두고 그저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쪽으로의 변화, 그러니까 '나 자신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생기는 변화들, 그 모든 변화의 순간들이 그토록 반짝이는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라는 표현은 그 변화를 위한 치열한 삶 속에서 나온 기가 막히게 멋진 워딩일 것이고. 읽을 때마다 그 시기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이 눈에 들어온다. 책은 같은 내용을 담고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말이다. 고마운 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