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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27. 2022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제일 싫었던 적이 있다면

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나는 아이유를 좋아한다. 국힙 원탑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그녀를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이겠냐만은. 요새는 우리 집 세 살 아이마저 '엄마가 좋아하는~ 아이유이~'이모의 노래를 틀라고 한다.


그래도 이 참에 몇 자 적어보자면, '나는 아이유가 좋더라'라고 말하게 된 건, 2015년 10월 CHAT-SHIRE 앨범이 발표되었을 때부터였다. 그전까지 나의 아이돌 3대장은 설리, 현아, 지연(티아라)이었는데 그 자리에 아이유가 등극했다. 아이유는 그룹 출신이 아니기도 하고 결이 조금 달라서 아이돌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저 내 편의대로) 나의 아이돌 4대장은 그렇게 완성이 됐었다.


 스물셋의 가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쓰였고 앨범의 다른 수록곡들, <푸르던>, <무릎>, <안경> 등을 들으면서 당시에 큰 위로를 받았다. 정말이지 인생 최악의 시기에 들었던 곡들이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중증의 주요 우울 장애 진단을 받고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던 시기였다. 하루에 2시간 이상을 자지 못하는 밤이 반년 이상 지속됐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았던,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던 시절이었다. 음악을 듣는 잠시나마 큰 위로가 됐다.


 그 이전에는 아이유라는 가수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복숭아>, <봄 사랑 벚꽃 말고>, <마음>과 같은 '노래'를 좋아했었다. 챗셔 앨범 이후에 <밤편지>, <사랑이 잘>, <팔레트> 앨범, 그리고 <라일락> 앨범까지 꾸준히 잘 듣고 있다. 더러 취향에 맞지 않는 곡들이 있더라도, 일단 한 번은 귀 기울여 보게 만드는 설득의 힘을 갖춘 아티스트가 되어 버렸다. 더불어 <나의 아저씨>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가창, 작사, 작곡 그리고 연기까지 모두 되는 그녀가 비주얼마저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찾은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그녀만의 감수성과 영민함의 조화는 앨범 소개글이나 인터뷰에서도 빛을 발한다. 내면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정리된 언어를 통해 나 또한 공감하며 무언가를 배우게 되기도 한다.




  이 글은 2021년 3월에 발매된 앨범 <라일락>의 수록곡 중 하나인 <아이와 나의 바다>에 대한 얘기다. 스케일이 크고 무척 웅장한 곡인지만, 노래의 처음과 끝은 바다의 가장 깊은 바닥에 내려앉은 목소리처럼 아주 고요하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첫 소절을 듣자마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면서 쭉 이어지는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내 마음을 복사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일들이 있지.

내가 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맘이 가난한 밤이야"


상처를 받았든 상처를 줬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잘 아물지 않는 일들이 있고, 그런 일들은 내가 날 온전히 사랑하는 걸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마음이 풍요롭지 못하고 늘 어딘가 한 구석 가난하고 결핍되어있다. 이윽고 다음 가사에서는 말 그대로 울컥해 버렸다.


"수많은 소원 아래 매일 다른 꿈을 꾸던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어린 시절의 꿈 많던 그 아이가 '겨우, 지금의 내가 되려고'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아팠던 걸까라는 문장은 이 곡의 백미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결국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고백으로 1절이 끝난다.


나는 상당한 시간을 자기혐오에 시달렸는데, '겉으로만 멀쩡하고 고작 이렇게 별로인 나, 남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사실 이렇게 흠 많은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누구든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나를 싫어할 거라는 두려움이 항상 있었다.


내가 선택하고 행동한 것들이 모두 한심하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용서할 수 없었던 시간이 꽤 오래였다. 이런 생각 안에 갇혀 있던 시절에는 내가 '자기혐오'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인지 몰랐고, 겨우 조금 빠져나오고 나니 비로소 그때의 나 자신이 보이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으로부터는 꽤나 멀리 왔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이 생각들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다행히 빠져나오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2절은 분위기가 바뀐다. 어린 날의 나에 대한 얘기는 바다처럼 푸르고 넓고 깊은, 삶의 생기와 에너지로 가득하다.


"영원히 가물지 않는"

"설렘으로 차오르던 나의 숨소리"

"머리 위로 선선히 부는 바람"

"어디로든 달려가고 싶어"

"세상은 그렇게 모든 순간 내게로 와

눈부신 선물이 되고"와 같은

가득 흘러넘치고 쏟아지는 언어들.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라는 물음이 저절로 따라붙기 때문이다. 나도 '아주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해맑게 나로서 존재하던 시기가 떠올랐다. 그 시절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됐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다. 아이는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귀하다. 이 아이가 커가면서 나처럼 스스로를 여긴다고 상상하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 아름다운데, 스스로를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한다면 말이다.


아이가 자기 자신을 어딘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크고 작은 죄책감 속에 움츠러들어 용기 있게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내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해보니.. 그제야 나 자신이 보였다.


나는 나를 용서해야만 했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다. 이 삶을,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실수를 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세상을 살아가며 어딘가 변해가고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되찾는 것도,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도 오롯이 내 몫이다. 내가 나를 먼저 알아줘야만 그 다음도 가능하다.


노래의 가사처럼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돌아오는 길'을 알게 되었으니 아주 오래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아질 것 같다. 아주 조금씩, 그럼에도 결국은,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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