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가 온다
아이를 낳고 32개월, 약 천일의 시간 동안 나는 찐 열공 모드였다. 그 속에 폭 빠져 살고 있을 땐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렇다.
그 천일동안 92권의 책을 즐겁게 완독 했고,
내 생각을 담은, 내게는 무척 의미 있는
38개의 “나만의 글”을 완성했고(잘 썼든 못 썼든),
매일 새벽 성경을 읽었다.
난생처음 30분 달리기에 도전하여
성취하는 기쁨도 맛보았고,
그 과정에서 10kg 이상이 감량되기도 했고
체력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내 생활을 가꾸고 가정을 돌보고 나 자신을 돌보고.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부침을 겪은 건 사실이다. 아이 두 돌 전까지를 생각하면 어딘가 마음 한편이 욱신하기도 하다. 나의 마음이 그리 편치 못했던 순간들이 지금에 와서는 더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그런 마음이 전달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솔직히 마음이 아프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육아가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물 밑에서 치열하게 노력해서 그 정도였던 것이기에, 후회는 없다. 나의 최선이었다.
주변도, 나 자신도 늘 잘 돌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내 나름의 성실을 다했다는 점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공부하는 시간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것이 편하고 불편한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여러 경험을 나의 언어로 정리해 가면서 보다 견고하게 자아에 대한 감각을 구축할 수 있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채 아무 데고 굴러다녀 나의 마음이라는 방을 어지럽히던 것들도 하나둘 정체를 드러냈다. 한 가닥 한 가닥 언어화되고 제 자리를 찾고 나니, 방에 빛이 들고 있었던 것이 이제 보인다. 자연스럽게 주변 관계도 재정립되면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편안한 마음이라니, 너무 오랜만이라 처음 느껴보는 것 같은 마음의 상태다.
그렇다고 당연히 늘 편안한 마음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일상의 파도 앞에 흔들리기도 하고, 흔들릴 때마다 내가 여태까지 공부하고 깨달아 왔다고 믿은 것이 실상 거짓 성장은 아니었나, 내게 여러 상황을 극복할 내면의 힘이 진짜 있는 건가 의심이 피어오를 때도 있다. 나의 성장이 모든 영역에서 고루 완벽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영역에서는 온전히 깨어있기도 하고 어떤 영역에서는 여전히 허우적대거나 주춤하기도 한다.
다만 이전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마음의 상태가 힘든 시기라고 하여 마구 흔들리며 내 일상이 잠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일상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 나를 자극한 표피적인 사건만을 놓고, 그것에만 집중하며 파헤치고 곱씹으며 불안해하고 걱정했다. 혹은 나 아닌 외부의 대상에게 의존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말끔히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더라도(일상의 부침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오늘 아침, 점심, 저녁 나와 가족을 위한 먹을거리를 챙기고 현재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하루 정도 휘청이긴 하지만 일기를 쓰고 생각을 정리하며 내 마음이 어디서 무너졌고 어디서부터 회복될 수 있는지 파악한다. 그리고 회복될 수 있는 행동을 뭐가 됐든 작은 것부터 실행해 본다.
한 마디로 지금 이 기분의 모드를 바꾸기 위해 내가 가져다 쓸 수 있는 내적 자원이 풍부해졌다. 그간의 공부를 통해 '나'에 대한 데이터가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내 마음과 몸 상태를 감각적으로 느끼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해주면 된다(이전에는 이걸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혼자 잔뜩 웅크려 있었다). 기분의 모드가 바뀌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고 상황 자체를 보는 관점이 바뀌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의 일상을 망치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나를 위한 아주 작은 행동들로부터 생겨난다. 이건 분명 실재하는 성장이다.
더불어 이 시간을 기반으로 이제는 새로운 관심사도 서서히 움트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이제야 나를 알고 비로소 나다운 꿈을 꾼다. 앞으로 새로운 영역에 대한 공부를 꾸준하게 해 볼 생각이고, 관련한 새로운 습관과 생활태도를 내면화하고 싶다. 즐겁게 배우고, 외유내강하게 살아내고 싶다. 단단한 내면을 가진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다.
깊이 가라앉은 고요한 시간 동안 아주 어렵사리 ‘나’와 접속되고 나서야, ‘세상’과 접속할 에너지가 조금씩 저절로 피어난다. 물론 여전히 책을 즐거이 읽을 것이고(나의 가장 오랜 좋은 선생이고 친구니까),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본능적으로 내면을 탐구하게 될 것이고, 성경 공부도 계속할 것이고, 걷고 달리는 것도 꾸준히 할 것이다.
다만 무엇을 하든 억지로 무언가를 계획하기보다는
천천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내 마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순간순간 깨어있는 상태로 잘 감각하며,
편안한 마음,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큰 것도 작은 것도 그 과정을 통해
반갑게 오고 유쾌하게 지나갈 것이라 믿는다.
새 시대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