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정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자도 손편지 사연은 이제 못 받을 것 같은데, 인권위 조사관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손편지를 받는다. 손편지하면 떠오르는 방울방울 한 아날로그 감수성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교도소나 유치장, 정신병원에서 보내 진 봉투에는 누군가가 꾹꾹 눌러쓴 분명한 손편지들이 담겨있다. 이들 중 많은 사연은 휘갈긴 글씨체, 틀린 문장, 띄어쓰기를 아예 안 하거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자가 깨알같이 작거나 아이 주먹보다도 커서, 해독 그 자체가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날 그런 편지들 사이에,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보기 드문 아름다운 필체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예쁜 손글씨 교본에 나오는 글씨만큼 정갈하고 반듯한 필체를 가진 주인공의 얘기는 글씨체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사연이었다.
명문대학을 졸업해서 대기업 간부로 일하다가 어떤 연유로 해고가 된 후 오래도록 노숙 생활을 해 왔다고,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중년의 ‘라떼는 말이야’ 만큼이나 민원인들의 ‘예전엔 말이야’도 흔한 레퍼토리지만, 글씨체 때문인지 편지 사연이 순정한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 생필품 매장에서 참치 통조림 2개를 훔쳤다는 이유로 구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노숙 생활 중에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치거나 무전취식으로 처벌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 사건 통조림만큼은 절대 훔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통조림 2개로 구금이 되었다는 사연을 믿기 어려웠지만, 글씨체 때문이었을까, 일단 자세한 내용을 만나서 들어 보고 싶었다.
구치소에서 그를 부르기 전에 재판 기록 일부를 살펴보았는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구속 관련 서류에는 대략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12월 24일 21 :00 씨 무렵 **시의 ** 매장에서 6,000원 상당의 참치 통조림 2개를 절도함” 장발장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무슨 통조림 2개 때문에 사람이 구속될까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구치소 조사실에서 그를 마주하고 보니, 그는 자신의 글씨체만큼이나 점잖은 사람이었다. 별거 아닌 일로 먼 길 오시게 했다며 나를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했다. 통조림 2개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구금된 일은 별것이 아닌 게 아닌데….
가끔 배고픔 때문에 음식을 훔친 사례가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인천의 한 마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식료품을 훔치다 적발되었는데, 훔친 물건이 우유 2팩, 사과 6알, 음료수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붙잡힌 아버지는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며 잘못을 시인했고 경찰이 이 부자를 훈방 조치하고 따뜻한 국밥을 대접했다는 미담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다. 국밥을 먹는 도중 이름을 밝히지 않는 시민이 20만 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부자에게 건네주고 사라진 사실도 알려지면서 더 큰 화제가 되었다. 담당 경찰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법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이런 미담이지만 현실의 법은 훨씬 더 냉정하고 준엄하다. 아름다운 손글씨를 쓰는 남자는 언론에 소개된 아버지와는 달리 통조림 절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서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법원이 보기에 그가 음식을 절도했던 전과가 여러 번 있고, 주거도 불분명한 데다 반성은커녕 죄를 부인했기 때문에 도주의 우려가 크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후에 나는 경찰서로부터 받은 수사 자료를 꼼꼼히 살펴봤다. 남자의 가방에서 통조림 2개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생필품 매장에서 훔쳤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CCTV에서도 그가 통조림을 가방에 넣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증거물인 통조림은 현장에서 압수되어 업주 측에 넘겨졌고, 재판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팔려버린 상태였다. 적어도 통조림이 물증으로만 남겨져 있었다면 제조번호 등을 조사해서 남자가 주장한 대로 서울 종로의 가게에서 판매된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장에서 남자를 체포한 경찰들은 압수물인 통조림을 매장 측에 돌려준 것은 잘못이지만, 그가 분명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범임이 맞는지는 답을 하지 못했다.
재판 중에서도 진실 공방이 이어졌다. 나는 재판을 방청하면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검은색 법복의 판사와 검사, 그리고 증인으로 나온 경찰들, 생필품 매장의 직원들, 속기사와 방호 인원들, 막대한 분량의 서류 더미와 CCTV 기록, 엄숙한 재판장의 이 모든 풍경이 참치 통조림 2개의 범인을 찾기 위함이라니, 마치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동극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원하는 법의 정의일까?
여기까지 읽다 보면, 인권위 조사관의 역할이 무엇인지 막 묻고 싶어질 것 같다. 맞다. 조사하는 나도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자주 있었다. 통조림 사건에서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인권위는 궁극적으로 피고인의 유죄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조사하는 곳이 아니다. 범죄의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수사기관과 법원의 역할이다. 인권위는 체포나 구속, 재판의 절차 중에 권리 침해가 있었는지를 조사하여 인권침해 여부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나는 통조림 사건에서 인권위 조사관의 역할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통조림이 압수되고 폐기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조림 2개를 훔쳤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구속할 정도로 법이 엄정해야 한다면 그 과정의 적법절차는 더욱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의 압수품이었던 통조림 2개의 처리는 분명 적법절차를 위반했다고 보였지만, 이 사건의 조사 결과를 심의했던 인권위원들은 절도죄 재판의 결과를 더 지켜보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사건의 결정을 보류했다.
그러나 참치 통조림 2개로 생긴 절도 사건의 진실은 끝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재판이 지연되면서 그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의 진행 과정을 보아온 나로서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선고될 것을 확신했다.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구속되었던 4개월의 형사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서 그가 남은 재판을 잘 받기를 바랐다. 무죄를 밝히는 것도 중요했지만 얼마간의 형사보상금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석방된 이후에 더 이상 재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통조림 사건은 피고인이 도주한 사건이 되었고, 궐석재판의 관행에 따라서 검사가 구형한 1년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곧바로 수배 조처가 내려졌다.
그가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후 그가 수배 중에 체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다른 사건으로 교도소 조사를 갔다가 그를 잠깐 면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별거 아닌 일로 먼 걸음을 하게 했다며 사과했다. 그는 거주지가 없어 법원이 보낸 출석통지서를 받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면서 자신은 무죄이기 때문에 재판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어쩐지 그 말을 하는 남자의 눈이 빈 항아리 속처럼 컴컴했다.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었다. 그때가 막 겨울이 시작되던 12월 초였다. 교도소를 빠져나오는데 금세 눈이 내릴 것처럼 사위가 어두워지고 걷기 힘들 정도로 찬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던 것 같다. 그가 참치 통조림 때문에 체포되던 밤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