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노는 애가 뭐 그리 힘들다고 그러니. 힘들게 바깥일 하는 남편이 불쌍하지도 않니.
네 남편 그만 들들 볶고, 네가 좀 이해하렴."
평소 '딸 같은 며느리’라는 말은 달고 살던 시어머님의 말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부부싸움 하소연을 시어머니한테 하다니. 이건 온전한 나의 판단미스다. 번지수 잘 못 찾은 나의 투정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첫 아이 출산 후,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던 무렵이었다.
이때 알았다. '아, 딸 같은 며느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구나.'
나는 집에서 노는 여자, '전업주부'다. 시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말이다. 시댁에서 나는 공식적인 '노는 여자'다. 그래서 전업주부인 나는 집안 대소사에 항상 제일 먼저 불려 간다. 바쁜 남편 대신 김장에 혼자 가고, 제사에 혼자 간다. 가부장적인 시댁 분위기상 육아나 살림으로 인해 우울하거나 힘들다는 소리는 복에 겨운 소리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차라리, 나가서 돈을 벌고 싶다. 조금만 육아를 도와줄 가족이 있다면, 나도 정말 집에서 놀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 평범하게 여겨지는 이 과정 속 나는 자꾸 지워진다. 그저 바깥일 하는 남편 밥을 잘 챙기고, 건강을 챙기는 착한 아내. 쑥쑥 커가는 아이를 잘 케어하는 올바른 엄마, 시댁 어른들을 살뜰히 챙기는 착한 며느리만 남는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도 정말 '현모양처'를 꿈꿨'었'다. 사실 나는 요즘 시대로 치면 다소 촌스러운 인간이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고, 착한 며느리로 살 생각이었다. 육아와 일까지 겸하기엔 허약한 몸도 한몫했다. 남편 사랑받으면서 집에서 애를 키우는 일에 만족하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아기 울음소리가 알람이 되어 퍼뜩 일어나 아기를 달래고, 남편을 깨워 밥을 주고 출근시킨다. 아기 밥을 먹이고, 집을 청소하고, 밀린 빨래를 한다. 아기 눈치를 틈틈이 보며 아기 밥을 만든다. 이내 아기가 하품을 시작하면 아기를 재운다. 아기가 자는 사이 늘어진 장난감을 치우고 각종 집안일은 마무리한다. 아기가 깨어나면 벌써 저녁 준비 시간이고, 남편을 맞이한다.
나는 또 밥을 하고 설거지한다. 또 아기랑 놀아주고 밥을 챙겨주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장난감을 챙긴다. 온종일 밥 하기, 설거지, 장난감 치우기, 아기 케어하기 등 흔히 말하는 단순노동의 연속이다. '돈도 안 되는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이 행위들이 내 일상을 채운다. 집안일만 했을 뿐인데 하루가 빠르게 가버린다. 헝클어진 머리에 분유 냄새나는 얼룩진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나의 하루가 저문다.
그렇게 난 '집에서 노는 여자'로 내 일상을 채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가 주는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행복하면서도 마음이 공허하다.
'어머니, 저는 집에서 놀았을 뿐인데 왜 이리 고단하죠'
위의 글은 내가 몇 년 전 푸념처럼 적어 놓은 글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전업주부' 생활에 큰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전업주부 생활을 박차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인데, 용기를 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혼 10년 차, 거의 결혼과 동시에 일은 그만두고 보니 '살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졌다. 사실상 취업대신 취집을 했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나'라는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나를 바로 세우는 대신 결혼으로 도피해 버린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다시 나를 찾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하니 조금씩 생기를 찾고 있다. 나처럼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여성이나 결혼을 인생의 도피로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나 같은 실수를 당신은 굳이 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라고 말이다. 혹여나 잠시 인생이 힘들어 남에게 기대려고 하는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 놓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