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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Oct 21. 2019

문학 시간에는 시를 배운 적이 없다

윤동주와 김소월, 그리고 조지훈

중학교 때 국어 시간, 고등학교 때 문학 시간에 수업을 들을 때면, 지겨울 정도로 시를 공부했다.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눈에 딱지가 앉도록 읽고, 밑줄을 쳐댔다. 국어 선생님들은 항상 시를 '찢어서' 가르쳤다.

"1연 봐라. 1연 끝에 꺾쇠 표시해라. 1연에서 말하는 주제가 뭐냐. 그렇지. 1연 2행에 네-모 표시. 핵심 시어다..."

국어 선생님들에게 시는 먹기 좋게 정돈되어 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형식적으로 시 구절들을 해석해주고 시의 주제를 읊는 것을 50분 동안 반복하다 보면, 잠깐 조는 틈에 시 2~3개를 구절 별로, 주제 별로 낱낱이 쪼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이런 '시 쪼개기'는 극에 달했다. 수능 문제 한 문제를 더 맞히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들은 교과서는 제쳐두고서, 수능 시험에 반영되는 EBS 연계 교재 속 시들을 하루에만 3, 4개씩 영혼 없이 쪼갰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에 반 이상은 진작에 곯아떨어졌고, 선생님들은 눈만 뜨고, 입만 열면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소설이니 수필이니 하는 것들은 수업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길기만 한 줄글들은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다루기 힘들기만 한 것이었다. 많게는 교재의 3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텍스트들을 시 쪼개듯이 낱낱이 쪼개서 가르칠 수 없에, 국어 선생님들은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국어 선생님들은 지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의미 없이 주욱 읽어주기만 했다. 등장인물이 누구고,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논외였다. 중학교 때부터 배웠던 '소설의 기승전결' 따위도 그 시간만큼은 무의미한 이론일 뿐이었다. 지문의 말미에서야 "1번 문제... 다음 보기를 읽고..." 하면서 문제 풀어주기만 했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50분의 수업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다. 대학 갈 사람과 가지 않을 사람, 수능 공부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철저히 이분화되어있는 교실에서 교과목의 '문학' 시간은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처음 펜을 들어 쓴 글은 모순적이게도 짤막한 시였다. 그냥 쓰고 싶었다. 누가 시킨 것도, 감명 깊게 읽은 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시 비슷한 것을 써재끼려고 애썼다.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봤던, 수능 시험지에서 봤던 그 시들의 찰진 맛에는 한참 못 미쳤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문장만으로 조지훈의 <승무>나 윤동주의 <자화상>처럼  읽어도,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시를 쓸 수 없었다. 용기 내서 쓴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도, 돌아오는 반응은 '식상하다.' '뻔한 표현이다.' '이런 거 쓸 거면 차라리 때려치워라'며 날카롭게 후벼 파는 피드백뿐이었다.


나는 시 쓰기를 포기했다. 적어도 내가 나이를 50개, 60개를 먹지 않는 이상, 시를 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시는 나같이 몇십 년 살지도 않은 애송이가 덥석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어도 문장 한 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그런 능력은 나에게 없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런 글을 쓰지 않았던가.

"For sales: Baby shoes. Never worn."


단 6 단어로 쓴 '소설'에 그는 모든 것을 담았다. 헤밍웨이가 '소설가'였기 때문에 '소설'이라 부르는 것이지, 어찌 보면 '시'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는 그의 '시'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과 괴로움을 단 한 줄에 담았다. 그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줄로 하여금 읽는 사람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부끄러웠다. 나는 아직 달랑 한 줄에 내 인생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담을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성숙한 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 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시 읽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더군다나 쓰는 법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시를 쓴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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