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국어 시간, 고등학교 때 문학 시간에 수업을 들을 때면, 지겨울 정도로 시를 공부했다.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눈에 딱지가 앉도록 읽고, 밑줄을 쳐댔다. 국어 선생님들은 항상 시를 '찢어서' 가르쳤다.
"1연 봐라. 1연 끝에 꺾쇠 표시해라. 1연에서 말하는 주제가 뭐냐. 그렇지. 1연 2행에 네-모 표시. 핵심 시어다..."
국어 선생님들에게 시는 먹기 좋게 정돈되어 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형식적으로 시 구절들을 해석해주고 시의 주제를 읊는 것을 50분 동안 반복하다 보면, 잠깐 조는 틈에 시 2~3개를 구절 별로, 주제 별로 낱낱이 쪼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이런 '시 쪼개기'는 극에 달했다. 수능 문제 한 문제를 더 맞히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들은 교과서는 제쳐두고서, 수능 시험에 반영되는 EBS 연계 교재 속 시들을 하루에만 3, 4개씩 영혼 없이 쪼갰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에 반 이상은 진작에 곯아떨어졌고, 선생님들은 눈만 뜨고, 입만 열면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소설이니 수필이니 하는 것들은 수업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길기만 한 줄글들은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다루기 힘들기만 한 것이었다. 많게는 교재의 3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텍스트들을 시 쪼개듯이 낱낱이 쪼개서 가르칠 수 없기에, 국어 선생님들은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국어 선생님들은 지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의미 없이 주욱 읽어주기만 했다. 등장인물이 누구고,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논외였다. 중학교 때부터 배웠던 '소설의 기승전결' 따위도 그 시간만큼은 무의미한 이론일 뿐이었다. 지문의 말미에서야 "1번 문제... 다음 보기를 읽고..." 하면서 문제를 풀어주기만 했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50분의 수업시간을 무의미하게보냈다. 대학 갈 사람과 가지 않을 사람, 수능 공부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철저히 이분화되어있는 교실에서 교과목의 '문학' 시간은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처음 펜을 들어 쓴 글은 모순적이게도 짤막한 시였다. 그냥 쓰고 싶었다. 누가 시킨 것도, 감명 깊게 읽은 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시 비슷한 것을 써재끼려고 애썼다.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봤던, 수능 시험지에서 봤던 그 시들의 찰진 맛에는 한참 못 미쳤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문장만으로 조지훈의 <승무>나 윤동주의 <자화상>처럼 읽어도,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시를 쓸 수 없었다. 용기 내서 쓴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도, 돌아오는 반응은 '식상하다.' '뻔한 표현이다.' '이런 거 쓸 거면 차라리 때려치워라'며 날카롭게 후벼 파는 피드백뿐이었다.
나는 시 쓰기를 포기했다. 적어도 내가 나이를 50개, 60개를 먹지 않는 이상, 시를 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시는 나같이 몇십 년 살지도 않은 애송이가 덥석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적어도 문장 한 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그런 능력은 나에게 없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런 글을 쓰지 않았던가.
"For sales: Baby shoes. Never worn."
단 6 단어로 쓴 '소설'에 그는 모든 것을 담았다. 헤밍웨이가 '소설가'였기 때문에 '소설'이라 부르는 것이지, 어찌 보면 '시'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는 그의 '시'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과 괴로움을 단 한 줄에 담았다. 그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줄로 하여금 읽는 사람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부끄러웠다. 나는 아직 달랑 한 줄에 내 인생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담을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성숙한 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 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시 읽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더군다나 쓰는 법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시를 쓴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