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유
누구나 여행을 꿈꾼다.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해외여행을 가보지 않은 아빠가 어느 날 TV에 방영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저기는 가볼 만하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빠가 말한 여행지는 페루의 마추픽추였다. 나도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라 아빠와 함께 해외여행을 떠난다면 페루의 마추픽추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은 누군가에게는 꿈, 누군가에게는 일상, 또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이다. 나에게 여행은 꿈이었다. 어린 시절 집 한편에 놓여있던 책꽂이에는 엄마의 손때가 묻어있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던 책은 여행책이었다. 그 당시에 쓰인 여행책은 우리나라 여행 1세대라 불러도 좋을 그런 책들이었는데 어린 나는 그 책들을 읽으며 여행을 꿈꿨다. 성인이 되면 배낭 하나를 메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나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고 방황하는 시간이 길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선택한 일은 내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알게 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음에도 낯선 서울, 고시원,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나는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날의 사랑이 그렇듯이 사랑만으로 충만한 시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나를 채웠다. 나는 항상 넓은 세상을 꿈꿨다.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게 됐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상상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을 버는,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것보다 수입이 적은 겉모습만 직장인일 뿐이었다. 나는 4대 보험도 적용받지 못했지만 공연이 좋아서, 사랑이 좋아서 나의 20대 중반을 보냈다.
처음으로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에 나는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인생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며 살았다 생각했는데 정작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왔더라. 나는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면서 하기 싫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았다.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정작 제대로 노력한 적은 없었다. 나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일보다 하루를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보내는 날들에 익숙해졌다. 문득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삶을 원한 게 아닌데, 어차피 돈도 많이 벌지 못하고 지금 일하는 분야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늦기 전에 여행을 떠나자 생각했다. 미련이 없으니 회사를 그만두는 건 어렵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2개월 뒤, 나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지만 나는 여행 전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나를 만났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도 마주할 수 있었다. 여행은 그 자체로 나에게 단단한 경험으로 남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지 못한지도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여행을 떠났던 그 순간이, 자유롭게 국내와 해외를 여행하던 날들이 정말 꿈만 같다. 나는 여행을 끝내고 2018년 봄, 한국에 돌아왔다. 여행 후에 나는 2번의 입사와 퇴사를 겪었다. 모두 계약기간 만료였고 지인 혹은 가족이 소개해준 일자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싫다고 이야기했을 것들에 나는 '예스(yes)'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자기 객관화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다. 과거의 나는 조금만 노력하면 실력을 쌓고 흔히 회사원으로 불리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고 실력을 쌓을 노력도 꾸준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이 내가 무서워서 도망쳤던 것이고 내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편한 길을 선택했다. 여행 후에 나는 단지 돈을 벌 수 있음에 감사했고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익숙한 감정을 느끼며 살았다.
나의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종종 성급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쳤다. 내가 계획했던 것들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성장하지 못한 못난 마음이 나를 덮쳤다. 게으르고 한 없이 미루던 습관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지만 계속 나를 사랑해주길 바랐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모든 일에 내 탓을 했고 스스로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사람이라며 자괴감의 굴레에 빠져있었다. 힘든 날은 언제든 찾아오는 법인데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해 한참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그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긴 여행 후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다. 쉽게 가려고 하면 반드시 그 대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해서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랐다. 그래서 좋은 결과나 있다거나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냥 적당히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닌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런 내가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여행이다. 여행, 먹고 놀기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왜 이렇게 여행을 바라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늘 낯선 곳에 나를 던진다. 외로움도 온전히 내 몫이고 두려움과 기쁨,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는 건 모두 나라는 존재다. 생각해보니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내가 도망친 곳이 여행이었다. 그리고 여행에서 나는 여행의 일상도 곧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여행은 나에게 현실을 보게 만들었고 다른 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날을 오늘도 그려본다.
지금 나는 언제든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오늘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종종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아직도 미루고 싶은 순간들이 나를 찾아온다. 결국에는 해야 한다는 걸 알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갖고 있는 게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내 힘으로 이룬 것이라면 그건 나에게 엄청난 성취감으로 돌아온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더라도 일상을, 나의 오늘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아간다.
꿈 많은 이상주의자. 현실은 제대로 보지 않고 노력하지 않은 채 기대치만 높은 사람 그래서 나는 나를 많이 괴롭혔다. 방황한 시간이 긴 만큼 나는 아직도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아마 평생을 방황하며 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날엔가 떠나게 될 다음의 여행을 위해서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뿐이다. 내 사과나무는 앞으로도 계속 변하겠지만 온전히 나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먹고사는 것,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어렵기도 한 그것을 나는 이제야 실천한다. 누구도 아닌 나의 삶. 예전에는 무언가 거창한 것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살아있다는 것, 글을 쓰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두서없지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누군가 나에게 '여행 좋아해요?’라고 물으면 '네, 좋아합니다. 여행 정말 좋아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