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순간이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서 떠났던 날,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여행을 가던 날, 배낭을 메고 장기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한다.
처음 여행을 떠나는 날,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여행이 길어지면 어느새 여행도 익숙해지는 순간이 온다. 한 나라에 오래 머물게 됐을 때 나는 거기서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여행지에서의 루틴이 생긴다. 나는 여행지에서 부지런한 여행자가 아니었다. 시간을 정해둔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매번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게으른 여행자로 살았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나라들을 둘러보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변한듯 변하지 않았고 다시 일상을 살기 위해 한 발 내딛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여행을 꿈꾸고 있다. 안정적이지 않은 생활의 반복은 나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꿈꾸게 했다. 하지만 노력은 그에 비례하지 않았고 나는 방황을 지속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는 오늘의 내가 됐다.
여행을 다녀 왔다고 해서 내 인생이 180도로 변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방황했고 울고 싶은 순간, 피하고 싶은 순간,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저 살아갔다.
잊지 못하는 여행의 순간들이 있다. 골목에서 길을 잃었던 순간, 부끄러웠던 기억, 나는 한 없이 작은 존재라고 느꼈던 때, 웅장하고 아름다운 순간에 이런 멋진 순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매일 여행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연장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 이 모든 순간들은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들이다.
지금 나는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코로나19는 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지만 덕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 겪는 이별은 나를 돌아보게 했고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것 뿐이다.
나는 무척이나 게으른 사람이다. 피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대충 일을 미루며 살아왔다. 부딪히고 깨지면서 배운 것도 있지만 피할 수 있다면 그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올해 많이 했던 생각 중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계속 미루고 게으르게 산다면 앞으로 다시는 여행을 꿈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명상을 하고 밖으로 나가 달리기를 하고 잡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서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아직도 오늘에 집중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렇지만 예전보다는 빠르게 현실로 돌아온다. 나만의 동굴에 갇혀있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여행은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힘을 남겼다. 여행은 나에게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리고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살아간다는 것, 삶이라는 여행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보내며 살고 있을까. 그저 흘러가는 인연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난 여행은 나에게 많은 것을 줬다. 언제든 추억할 수 있는 추억들을 한 가득 만들어줬다. 하지만 그 추억 속에 갇혀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먹고 사는 일의 위대함을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저 오늘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꿈꾼다. 언제 떠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날 불쑥 떠났던 그때처럼 갑자기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여행이 내게 남긴 것은 일상을 살아갈 힘이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용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