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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rel Jan 13. 2019

유럽살이의 묘미, 아이와 떠나는 여행

다 포기하니 더 잘 보이더라 

유럽 살이의 묘미라 한다면, 아무래도 자유롭게 타국가를 넘나들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유럽연합(EU)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있는 유럽은 쇵겐조약을 통해 유럽 국가 간에는 비자나 번거로운 입국 수속 없이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고, 유로라는 단일 화폐를 사용한다. 각국을 오가는 저가 항공이 수시로 날아들고, 호스텔 같은 저가 숙박시설도 발달했다. 특히 베를린은 지정학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에 위치해, 유럽 어디든지 2시간 이내로 다닐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곳이다.  폴란드나 체코, 오스트리아 같은 동유럽권은 자동차나 기차여행도 가능하다.


우리도 8개월, 10개월, 12개월, 14개월, 16개월 하람이와 유럽 각국을 여행했다. 이 말을 하면 대부분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이가 없는 가정이나 미혼의 경우 '정말 부럽다'라고 했다. 아이가 있는 부모의 경우 '어떻게 그걸 했냐'며 감탄과 안타까움을 보였다. 아기 엄마들이 흔히 하는 얘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아이와 떠나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다. 아이 뒤치닥 거리를 하다 보면 여기가 하와인지, 파리인지, 서울 우리 집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도 하람이와 떠나기 전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리 부부는 원래 여행을 좋아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나는 여행 계획 세우는 것이 좋아 여행을 가는 사람이었다. 여행 가기 전 새로운 장소에 대해 공부하고,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해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현지 식당 예약을 한다. 한국어 사이트는 물론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현지인들이 남기는 정보까지 챙겨 여행에 나선다. 플랜 A는 물론 플랜 B, 플랜 C까지 짜고서 여행길에 나서는 것이 예년의 나였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니 많은 게 달라졌다. 일단 예약이란 게 불가능하다. 예측이 불가능해서 아이인 것이다. 12시부터 배고프다는 아이에게 오후 1시에 식당 예약을 해놓았으니 참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3시에 수영장 티켓을 끊어놨으니 그때까지 졸려도 잠을 자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아이가 몇 시쯤 먹고 자는지 대략적인 패턴은 있지만, 이 패턴이 예약시간을 정확하게 맞출 만큼 정교하지는 않다. 예고 없이 갑자기 아파버리는 것도 아이다. 노쇼(No-show)시 수수료를 날리게 되거나, 아예 티켓값 자체를 버리게 될 위험성이 컸다. 또 예약을 해놓으면 꼭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이 컨디션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강행군을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기본적인 숙소, 렌터카 등을 제외하고는 예약 없는 여행을 했다. 


미식 여행도 포기했다. 처음엔 포기가 안됐다. 그래서 졸린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무리해서 가거나, 유모차를 끌고 구글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헤맨 끝에 식당에 도착했다. 그러고서도 아이가 울까 봐, 혹은 잠들었을 때는 깰까 봐 10분 만에 군인이 짬밥 해치우듯 밥을 마셨다. 몇 번 해본 끝에 맛집 가는 것은 포기해야겠단 결론이 들었다. 제일 맛있는 식당은 아이가 기분이 좋고 배가 고플 때, 우리의 동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이다. 평소 여행 다닐 땐 호텔 조식은 거들떠도 안 봤다. 현지 맛집이 얼마나 많은데 호텔 조식으로 때울 순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여행 다녀보니 호텔 조식이 제일 효자였다. 야경 좋은 식당은 처음부터 언감생심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룸서비스를 시켜 먹는 게 제일 맘 편했다. 3번째 여행을 떠날 때쯤  "더 이상 맛집은 안 찾아가겠다"라고 했다. 남편은 "네가 그 말을 해주길 정말 기다렸다"라고 했다.


쇼핑도 포기다. 유럽에서 얼마나 쇼핑할 것이 많은가. 아무리 유럽(베를린)에 살고 있어도 프랑스 옷 매장은 독일에 없는 디자인이 있어서 좋고, 폴란드 화장품 가게는 독일 보다도 훨씬 저렴해서 좋고, 스페인 식재료 매장은 독일과 다른 향신료가 있어 좋다. 처음 몇 번은 남편이 바깥에서 하람이와 시간을 보내며 나의 쇼핑을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매장 안까지 하람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남편이 낯선 곳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느라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물건을 봐도 도무지 이걸 사야 할지 저걸 사야 할지 빨리 판단이 되지가 않았다. 맛집보다는 조금 더 뒤에, 한 5번째쯤 여행을 떠날 때 "쇼핑도 안 하겠다"라고 했다. 남편은 "정말 정말 잘한 생각"이라고 했다. 가끔 정말 쇼핑이 하고 싶을 땐 5분이 지나면 물건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빨리 첫눈에 본 것을 짚어 바로 샀다. 


대신 우리는 아이가 멈춰서는 곳에 함께 오래 멈춰 섰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아이는 취리히 유명 관광지 말고, 현지인들이 많이 나와 노는 공원에서 오래도록 뛰어놀았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압박이 없고, 예약해 놓은 곳도 없으니 우리는 마음 편하게 아이가 원하는 만큼 놀게 놔두었다. 실컷 뛰어놀았는지 아이는 유모차를 타겠다고 했다. 유모차를 타고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았다. 에너지를 맘껏 쏟아낸 아이는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 근처 풍광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걷다 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마침 공원 근처 다리 옆에 크레페 파는 청년이 서 있었다. 5유로를 주고 초코와 과일 크레페 두 개를 샀다. 다리가 마주 보이는 근처 벤치에 앉아 세 식구가 크레페를 나누어 먹었다. 남편도 아이도 나도 맛있게 다 먹었다. 오후 5시 무렵, 해는 조금씩 다리 위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리 밑에는 백조들이 삼삼오오 모여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한 여행 중 가장 여유롭고, 행복하고, 따뜻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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