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딱히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저, 친구랑 한없이 수다 떨고 싶은 날이 있었다.
집전화는 통화료 때문에 엄마 눈치가 보여서,
“내일 학교 가서 얘기해야지.”
그렇게 마음 접고 잠들던 밤.
그 시절엔, 참 다음 날을 잘 기다렸다.
좋아하는 오빠에게 편지를 쓰고,
매일같이 우체통을 열어보며 조마조마하던 시절도 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길이 무척 짧게 느껴졌고,
답장이 오지 않아도 그 기다림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본방사수를 하던 밤들도 있다.
채널은 몇 개 없었고, 재방송도 별로 없었다.
그 시간에 못 보면,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니 약속도 미루고, 일찍 집에 가고,
화장실도 참아가며 앉아 있곤 했다.
보고 싶은 걸 보기 위해 그만큼 절실했던 시간이었다.
우리를 위한 극장용 어린이 영화도 종종 개봉되었다.
‘우뢰매’며 ‘슈퍼홍길동’ 같은 제목들은
어린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졌고,
여름방학이 되면 친구들끼리 단체로 극장에 갔다.
땡볕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표를 사고, 자리를 잡고,
영화표와 받았던 책받침 한 장은
마치 작은 훈장처럼 느껴졌다.
지금처럼 유료 굿즈도 아니었고, 한정판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자잘한 추억 중엔
데일리 언니가 2편에서 바뀌었을 때
너무 놀라서 서울 방송국 전화번호를 찾아보려 했던 일도 있었다.(그땐 영화를 방송국에서 만드는 줄 알았다)
원래 배우로 다시 바뀐 3편을 보며,
전국의 어린이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다는 걸
어른들도 알아주었구나 싶었다.
어린이날이 되면
반 엄마들이 돌아가며 과자며 학용품을 챙겨 왔다.
아이들 명수에 맞춰서, 같은 수량으로,
집에 가는 길에 손이 모자라
과자봉지를 달랑거리며 들고,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멨다.
가방끈이 어깨를 눌러 아팠지만
행복의 무게 같아서 마냥 즐거웠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엔 늘 기다림이 있었다.
소풍, 방학, 크리스마스, 생일. 명절
우리는 ‘아직 안 온 것들’을 기꺼이 기다릴 줄 알았다.
기다림은 설레는 일이었고,
그 시간들은 우리를 어린이답게도,
때론 어른스럽게도 만들었다.
지금 아이들에게 그런 기다림이 있을까?
아니, 그런 기다림을 허락하는 세상일까?
요즘은 사방이 전문가다.
아이의 마음을 대변하겠다는 어른들,
TV 속 아이를 해석하는 패널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진짜 아이의 목소리는 없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건
아이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이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족하다고, 결핍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결핍을 겪어본 적 있나?
어쩌면 우리가 겪었던 건 결핍이 아니라
‘절제’였던 건 아닐까.
나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점점
어떤 감정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기대감, 설렘, 기다림.
그런 감정들은 시간과 여백 속에서 피어난다.
속도를 멈추지 않으면,
그 감정들은 피우지도 못한 채 스쳐간다.
살아가는 건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추고 느끼고, 지나가고 다시 붙잡는 일의 반복.
죽지 않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 ‘살고 있다’는 감각을 붙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어른들이 불행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건
애초에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누군가가 많이 행복해지는 대신
모두가 조금씩 행복해지는 길이 있다면
그게 진짜 우리가 꿈꾸던 ‘좋은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날’을 정말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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